장대(壯大)했던 우리 현대사를 한두 마디 필설로는 다 나타낼 수가 없다. 다만 명암으로 점철된 우리들이 걸어온 멀고도 험난했던 길을 그 편린이나마 돌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해 적어본다.
하지만 오늘의 이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그 달려온 역정을 무엇을 어떻게 적을까 우선 걱정이 앞선다. 아무래도 먹거리 얘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다.
내 일본서 광복 후 환국했을 때의 농촌은 그야말로 ‘보릿고개·초근목피’를 빼면 쓸 말이 없을 정도로 정말로 어려웠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생쥐 볼가심할 것도 없다’가 더 정확했다.
피상적으로 막연히 어려웠었다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그러나 오늘의 이 풍요로운 현실 앞에서는 이런 무거운 주제를 풀어내기가 너무 벅차 어쩌면 그게 당시를 설명하는데 적확(的確)하지 않을까 역발상으로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푸성귀인 생채 잘못 먹어 채독에 걸리고, 먹을 기회도 잘 없지만 어쩌다 육류를 먹고 간디스토마에 걸리기도 했다. 먹을 게 없을 때 지천으로 나는 물고기는 날 것, 익힌 것 가리지 않고 마구 먹었던 것이다. 오늘의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를 연상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농사! 농사도 사람의 힘이 아니라 순전히 하늘의 뜻이었다. 오늘에 비하면 원시적이지만 그나마 관개시설이 잘된 논은 나름으로 수확할 것이 많았지만 이른바 천수답은 하늘만 쳐다보기 일쑤였다. ‘흉년이 들어 기근을 면치 못했다’가 시대를 나타내는 수사(修辭)였다.
여간 풍년이 들어도 자기 소유 전답이 있어야 그리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족은 했지만 그나마도 없는 사람들은 비싼 소작료 물고 소작농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소작농들은 그나마 준비했던 양식은 봄이 되면 절량농가가 되는 것이 거의 정해논 순서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좀 가진 자가 ‘갑’이 되는 것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연명만 하는 긴긴 겨울을 넘기고 햇보리 날 때까지 제일 어렵다고 해 가슴 저린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겼다니 마음이 수수롭기도 하고 한편 우리가 걸어온 길이 가히 간난신고였음을 알게도 한다. 다 지나온 과거사이고 몸소 겪었다고 값싼 감상에 젖어 하는 말은 정말로 아니다.
6·25도 겪었다. 6·25 전후만 해도 생긴 대로 낳던 시절이었으니 인구는 폭증했고 이는 식량 부족으로 연결됐다. 그때가 아마 미국 잉여농산물을 무상으로 지원 받던 시대가 아닌가 한다. 이 사실도 현대사 명암의 한 부분이 됐으리라.
민족의 큰 전환기가 왔다. 5·16이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게 모든 국민의 의식이요 하나의 신앙이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절박한 시절이기도 했다. 정부는 앞에서 끌고 국민은 그 뒤에서 밀고 가는 개척함 ‘대한민국호’는 그렇게 잘 살아보자고 희망차게 출발하고 있었다.
곧 이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됐다. 어딜 가도 ‘증산·수출·건설’이 시대가 요구하는 캐치프레이즈였다. 밭두렁이나 어디 송곳 꽂을 땅만 있어도 호박을 심으라고 독려하던 시대였다. 잘 살아보자는 목표 하나에 민·관이 혼연일체가 됐던 것은 아마도 초유의 일이 아닌가 한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다수확 품종, 일반 품종보다 40여 알이 더 달리는 “통일벼”를 농진청이 7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계발하기에 이르렀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는 우리보다는 선진국이라는 필리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그게 정설임이 확인됐다.
정부는 곧 벼 다수확왕을 선발해 그 어렵던 시절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의 포상도 해주었다. 농민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만큼 식량 자족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던 것이다.
  초근목피, 보릿고개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어쩌면 외람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심스럽지만 우리 민족이 걸어온 모든 흥망의 길을 통해 기아를 면한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랬는데, 우리 현대사가 그랬는데 어느 날 어느 방송 화면은 자그만 충격으로 다가왔다.
농지도 아닌 땅에 지은 농사라고 해 다 익은 벼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그걸 지켜본 사람들은 거두어 어디 기부라도 하면 될 일인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다수확왕을 포상하며 생산을 독려했던 옛일이 생각났다. 배곯던 당시 아이들이 허여멀건 나물죽이라고 투정하면 어른들은 이 흉년에 그것도 오감타고 했고, 그것도 배불리 먹지 못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참 세상 많이 변했구나!’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금년도 풍년이 들어 쌀 재고량이 더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소비를 걱정해야 하는 오늘의 이 현실을 두고 역사의 반전이라고 하면 과대(誇大)가 되는 것일까…?
  어쨌거나 역사는 그렇게 변화하며 새롭게 열어간다는 것을 우리 현대사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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