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여름 한 철을 장터처럼 왁자하게 달구었던 두류공원의 분위기도 눈에 띄게 달라져 간다. 스산한 바람, 우수수 지는 낙엽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의 자취……, 느긋하던 발걸음이 쫓기듯 종종걸음으로 바뀐다.
  이런 시절이면 괜스레 마음마저 덩달아 공허해 온다. 꼭 주머니 속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지향 없이 쓸리는 가랑잎처럼, 생의 갈림길 앞에서 ‘어디로?’ 하며 되묻는 날들이 잦아진다. 이것이 유독 가을 타는 중년 남자의 어쭙잖은 감상感傷만은 아닐 것이다.
  매주 화요일 정오 무렵이면, 공원의 한쪽 편에서는 무료無料 급식소가 문을 연다. 무료無聊하게 소일을 하는 노인들이나 중·장년 실직자들이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들은 장기나 바둑, 화투놀이 따위로 지루함을 쫓다, 급식차가 도착할 시각이면 손에 손에 깔고 앉을 신문지 한 장씩 움켜쥐고 펭귄처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 급식 시간이 그들에게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오래 지속돼 온 불경기 탓인가 보다. 그 무료 급식소의 줄이 날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어두운 소식이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다. 한쪽에서는 가진 것을 주체하지 못해 흥청망청해 대는 판에 다른 한쪽에서는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니, 세상은 어찌 이리도 공평하지 못한가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더욱 마음이 우울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고단한 세상살이는 항시 있어 왔던 모양이다. 얼마나 지쳤으면 질기게 붙들고 있던 삶의 끈을 한순간에 놓아 버린 것일까. 공원 앞의 연못에다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줄을 이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그런 불행한 사태를 미리 방비해 보자는 뜻에서 비를 세우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이렇게 이어지는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삶」이란 시가 오목새김으로 새겨져 오늘도 고즈넉이 세월 속에 풍화돼 간다, 잔잔하게 이는 연못의 파문만이 그 날들의 아픔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을 뿐.
  세상이 버석대는 가랑잎처럼 각박해져 버렸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극심한 혼돈의 시대이다. 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태에 휘둘리다 보니 내남없이 주변을 돌아볼 한줌의 여유마저 잃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타자의 삶은 이교도처럼 외면한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달음박질하는 현대인의 소아적小我的 일상, 그 면도날 같은 몰인정에 나 역시 미필적 고의로 공범이 된 듯싶어 적이 스스러워진다.
  사흘이 멀다 하고 들려오는 세간의 자살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한계상황에까지 내몰려 삶의 지향점을 잃어버리고 부표처럼 떠도는 이웃들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바람 세찬 세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들은 절망한다. 살가운 말 한 마디, 따뜻한 위로의 눈길 한 번이 그들을 이 절망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리라.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가 있다.”라는 고뇌에 찬 명언을 남긴 분이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였던가.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맑히고 깊이는 벼리가 돼 준다. 심금을 울리는 불후의 예술작품들은 슬픔 속에서 피어난 눈물꽃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비단 예술뿐이랴. 설사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으리니. 세상에 목숨보다 갚진 것이 또 뭐가 있을까.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한때의 어려움에 무릎을 꿇어 허투루 내던져 버려서는 결코 아니 될 일이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질 줄 아는 인간애가 절실히 그리운 요즈음이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덜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이 너무도 평범해서 오히려 절실한 말이, 오늘따라 더욱 진한 의미로 가슴에 다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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