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 유아원 다니는 네 살짜리 손녀와 각 나라 국기의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이건 미국국기, 저건 일본국기 하다가 태극기를 보곤 이건 우리나라 국기 했더니 아니야 “저의나라 국기”라고 해서 자그만 충격을 받았다.
언제부턴가 ‘나, 우리’는 어디 가고 ‘저, 저희’만 있는지 참 모를 일이다.
방송 다채널 시대에 일반의 방송출연이 잦게 되면서 방송언어의 순화와 예절을 위해서는 꼭 경어를 써야 하고 속어·비속어를 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선지 모르지만 출연자마다 무분별하게 경어를 쓰다 보니 제 아내에게도 ‘저의 부인’이 되었고 드디어는 ‘우리나라’가 “저의나라”가 되기에 이르고 말았다.
지금도 간혹 무심결에 ‘저의…’로 쓰면 바로 계도해 고치는 경우가 있긴 하다. 계층, 세대, 학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저의’로 쓸 땐 참으로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또 있다. 나라가 우리나라라면 정부도 우리 정부다. 나라가 ‘우리’이면 정부도 당연히 ‘우리’가 상식인데, 왜 정부는 ‘저의’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국가 공공기관, 태극마크를 단 대표선수 등도 ‘우리…’여야 한다. 감독도 선수도 ‘저의’라고 쓸 땐 자존심이 상한다.
오래 전 우리 막걸리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온갖 것에 딴지를 거는 일본이 무슨 특허인가를 냈기 때문인데, 거리 인터뷰에서 막걸리가 누구거냐고 단호하게 물었더니 ‘저의 것’이라고 해 마치 준비나 하고 있었던 듯 튀어나왔다.
이렇듯 예고 없이 무심코 말을 할 때는 우리나라, 우리 집 하다가도 마이크라도 갖다 대면 정색을 하곤 그만 ‘저의’가 나오고 만다.
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우리! 이 얼마나 정감 넘치는 말인가. 자존감, 일체감, 공동체 의식…. 어는 고위 정치인이 ‘우리가 남이가…’ 했다가 지역주의를 부추긴다고 해 호된 여론의 몰매를 맞은 일이 있기도 했지만 ‘일체감’으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을 찾을 수가 없지 않는가?
나를 낮추는 겸양은 미덕이지만 지나치거나 격에 맞지 않으면 자기비하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겸양과 자존은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겸양은 나 보다는 남이 먼저이고 남을 존중한다는 뜻이며, 자존은 상대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존재감이다.
이 존재감을 상대에 따라 다르게 써야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즉 겸양의 상대는 부모, 스승, 연로한 어른, 내가 존경하는 분 기타 이에 준하는 정도의 상대로 한정돼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구분하지 않으니 모두 ‘저’가 되고 만다.
조국이나 나라 앞에 ‘우리’가 대전제이면 내가 속한 공사(公私) 단체, 일테면 우리군청, 우리학교여야 한다는 말이다.
‘나’, ‘우리’ 같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말이 또 있는가. 내 소속감이 왜 자랑스럽지 않고 낮춰야 하는가?
우리말의 경어는 외국인이 제일 어려워 한다는 것 중에 하나이다. 영어는 Sir 하면 되는데 우리말은 해라체, 하오체, 높임말, 아주높임말 등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다양·다원화 된 사회, 간소화와 획일화가 대세인지 ‘나’는 없고 모두가 ‘저’이다.
또 인칭 앞에는 왜 꼭 저의(사실은 저읜지 저흰지도 불분명)를 붙이는지 모르겠다.
가족 소개할 때 아버지, 어머니 하면 될 걸 꼭 저의를 붙인다. 이 또한 관사가 붙는 영어 탓인가?
사실 우리말이 좀 어렵긴 하다. 지칭 호칭이 다르고 여기다 존칭까지 맞게써야 하니 말이다.
이분 저 분은 지칭이요 선생님 과장님은 호칭이며 ‘분’은 어디에 써도 존칭이 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를 구분 않고 모두 지칭으로 쓰니 ‘과장분’이 되고 만다.
우리 민요의 ‘우리 벗님네야’라거나 농요의 ‘…농부님네 내 말 들어 보소’를 보면 호칭에는 님이 원형인데 언제부턴가 분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분으로 통칭하다 보니 ‘경찰분이 도둑분을 쫓으시다가 놓치셨는데…’, ‘우리나라 인구분이 모두 몇 분인가’ 할지도 모를 일이다.
존칭 과민인지 사람의 행위라고 다 존칭을 쓰다 보니 식품을 보고도 ‘이거 드실 수 있는 것이냐’라고도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나 저 우리 등의 용례와 오용에 대해 적어 보았다. 혹시 내 의견에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국립국어원이 있고 나·저의 구분, 언어예절의 규범, 겸양과 자존이 엄존하는 한 나의 이 주장에 오류는 없다이다.
만에 하나 관용어로 우리나라가 저의나라로 된다면 그때는 나도 내 주장을 접을 것이다. 이런 흐름이라면 언젠가는 ‘우리’는 사어(死語)가 되고 ‘저의’만 살아남을 지도 모르겠다.
이주여성들이 자기 조국을 ‘저의나라’라고 하고 있고 내 손녀가 ‘저의나라’라고 배우고 있으니 말이다.
언어는 역동성이 생명이라 초고속으로 발전해 가는 문명에 대처해야 하고 변전하는 언어생활의 세태에도 적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속어·방언과 인터넷의 보편화로 인한 신조어, 파생어 등의 표준화도 필요해 사전에 등재되고 있으니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일상어를 오류 없이 쓰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