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교훈을 젊은 세대에게 전하여,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 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며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신리 성낙순(87, 아명 상용, 창령인) 옹이 인터뷰 첫머리에 강조한 말이다. 6·25 전쟁이 발발할 때 성 옹은 22살의 청년이었다. 군에 징집영장을 받았지만 물밀듯이 쳐내려오는 인민군이 어느새 우리 마을에도 점령을 하고 말았다. 그로인해 군 입대는 잠시 보류되었고, 소, 돼지 등 마을의 가축들은 인민군들이 마구 잡아먹는 적 치하의 살벌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적 치하에서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부류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내 친구도 거기에 속해 날 더러 은근히 협력을 유도하기도 했고, 나중에 인민군들이 전세가 불리할 무렵에는 나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회유하기도 했지만 내가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인민군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집안에 꼭꼭 숨어있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미군과 우리군의 총공세에 인민군들이 차츰 밀려갈 무렵 양식을 하기 위해 방아를 찧으러 갔다가 나의 소집영장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는 전쟁터에 나가면 죽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터라 가족들의 걱정이 컸지만, 나라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향교자리에 집결해 신체검사에서 합격판정 받고 대구로
지금의 향교자리에 집결해 간단한 신체검사가 있었는데, 합격 판정을 받은 동료들과 함께 대구를 향해 걸어갔다. 인민군이 더 이상의 남하를 못하게 미군이 낙동강 다리를 끊은 직후라 배편으로 낙동강을 건넜다. 전쟁공포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라 행군을 하면서 나는 졸다가 가로수를 들이 받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구 남산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5일간 기초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래야 총은 만져보지도 못했고, 포복훈련이 전부였다. 훈련이 끝나고 기차 화물칸(곱배)에 짐짝처럼 실려 서울을 거쳐 강원도 춘천에 도착했다. 배가 몹시도 고파 들녘에 묶어 세워둔 콩 다발을 불에 그슬려 먹는 콩서리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부대가 한 곳에 주둔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동하다 또 전세가 불리하면 남쪽으로 이동하기를 수차례, 그만큼 밀고 밀리는 전쟁을 거듭했다. 춘천 시내가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밤에는 걷고 낮에는 인민군과 싸우며 1주일 만에 홍천에 도착했다. 장시간 걷다보니 발바닥이 터져 피가 범벅이 되었다. 그 때가 새해 1월 경,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야간 전투 중에 금기사항인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적에게 노출되는 위험천만한 행위도 더러는 했다.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다
전투를 벌이면서 아군 전사자도 많았지만, 인민군 전사자도 발길에 채여서 그들 품속에서 독한 중국 술이 발견돼 나눠 마시면서 추위를 견뎠다.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던 중에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중공군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포로가 되어 중공군에 이끌려 차츰 북으로 가다보니 춘천까지 올라가 어느 과수원 창고로 우리들을 몰아넣었다. 그나마 강원도에 흔한 감자와 시래깃국으로 식사를 제공 받았지만, 여전히 배는 고팠다. 적군 수중이라 옴짝달싹할 수가 없이 그저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군 포로들 중에는 장교도 많이 섞여 있었지만, 불이익을 염려해 계급장을 뗀 상태라 장교, 사병 구분이 불가능했지만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다른 병사에게 양보하는 사람은 대부분 장교들이었다. 말하자면 장교들도 배는 고프지만 사병들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 전쟁 중에도 사병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인민군에게 끌려 다니면서 우리들 포로들에게 인민군으로 지원하라고 권유받았다. 강제성은 없는 것 같았고, 오로지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다. 이렇게 끌려가다가는 결국에는 죽음뿐인 것을 직감하고 나는 전우 한 사람과 도망칠 것을 숨 죽이며 논의했다.

전우와 대열에서 이탈, 도망쳐 살아남아
중공군 맨 뒷쪽 대열에서 천천히 걸으며 낙오병으로 오인하도록 하다가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도망을 쳤다. 대열에서 이탈해 막상 도망은 쳤지만, 어디로 가야 남쪽인지 방향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훈련과정에 나무의 생김새를 보고 방향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남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배가고파 민가에 잠입했지만 다들 피난을 가고 대부분 집이 비어 있었다. 헛간이며 장독대 등 양식을 묻어둘 만한 곳을 막대기로 툭툭 치면서 쌀을 찾아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한동안 걷고 또 걷고 있을 때 미군에게 붙잡혀 대구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지만, 도무지 믿어주질 않았다. 여러 차례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혹시나 사상적으로 인민군에 동조하지나 않았는지를 조사받았다. 오해가 풀려 트럭을 타고 전주로 가서 사상 교육을 받고 강원도로 근무했던 부대에 원대복귀를 했다. 그때부터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무명고지, 854고지 등 전투에서 피·아군 전사자들이 수두룩했던 장면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질 않는다. 특히 오폭으로 아군 희생자들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백마고지 탈환작전에 참가, 긍지 느껴
당시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산 정상을 차지한 인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미 해병대와 한국군이 합동작전을 벌였지만 뺏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미군 비행기 공습으로 적군을 소탕하게 됐다. 얼마나 백마고지 전투가 치열했던 지 전쟁이 끝날 무렵에 백마고지는 황토 민둥산으로 변해 있었다. 한때 우리부대가 인민군에 포위당해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했고, 한치 앞을 알 수가 없는 전쟁을 치렀다. 전쟁이 너무 무서워서 오죽하면 내 손가락을 철모로 내리쳐 부상병을 자초하기까지 했을까. 성낙순 옹은 군 생활을 하면서 소대장을 비롯해 인사계 등 하사관으로서 간부를 했고 육군중사로 파견지 영동에서 제대를 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중매로 부인 이수점(82) 여사를 만나 슬하에 5남 1여를 뒀다. 효성이 남다른 자녀들 모두가 출가해 대구 등 대도시로 나가 잘 살고 있고, 막내아들은 사업차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6남매에서 태어난 손자·녀가 11명이 주말이면 할아버지 댁으로 와서 재롱을 부리고 있어 노부부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 기자가 방문했던 이날도 대구에 사는 셋째아들 성재경(46)씨가 자녀들을 데리고 왔고, 여러 명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왁자지껄 잔칫집 분위기여서 보기가 좋았다. 성낙순 옹은 2013년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정부에서 주는 ‘호국영웅기장’을 수여받아 늦은 감은 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다소 보상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