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공산군 수중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는데, 행정병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때로는 격전지에 투입되어 전우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지요” 그리고 “한마디로 전쟁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비참한 참상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똑똑히 봤지요.”

이 말은 6·25참전 유공자 배상규(86, 성산인)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경북고령지회장의 인터뷰 첫머리에 한 말이다. 배 지회장은 6·25가 터지고 몇 개월 후인 9월경 온 가족이 합천으로 피난을 했다. 그때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전세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오로지 살기위해 온 가족이 합천으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한 달 후 조금 잠잠한 틈을 타 고향인 개진면 반운리로 돌아와 보니 마을의 집들이 일부 폭격으로 불탔고, 불행하게도 우리 집도 불에 탔다. 다행히 불타지 않은 친척집에 피난보따리를 풀고 숨 좀 쉬려는데 바로 그때 군대에서 소집영장이 나왔다.

거역할 수 없는 국가의 부름이었다. 소집영장 받고 대구까지 걸어가 지금의 고령향교 자리에 집결해 전시여서 차도 없고, 방위장교의 인솔아래 대구를 향해 심야에 걷고, 또 걸었다. 길가에는 인민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사방에 깔려 있어서 갓길로는 갈 수가 없고 오로지 길 가운데로 줄지어 대구를 향해 걸었다. 혹시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인민군과 마주칠세라 극도로 조심하고 사주경계를 하면서 가다보니 피곤이 몰려와서 때때로 전봇대나 가로수를 들이받기도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착한 곳이 대구농림학교였다. 제2교육대에서 짧은 2주 교육과정을 받는 동안 처음 3일간은 배가 몹시도 고팠지만, 안량미 밥에 콩나물국은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굶다시피 했다.

그러나 3일이 지나 워낙 배가 고프니까 그것도 꿀맛이었다. 교실 마룻바닥이라 마대에 짚을 넣고 바닥에 깔고 생활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밟으면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 목구멍이 쾌쾌했지만 맨바닥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그러한 환경이지만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공산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 훈련에 임한 기억밖에 없다. 총 한 번 못 만져보고 전장으로 달려간 장병 수두룩 훈련과정에 웃지 못 할 진풍경도 많았다. 나는 다행히 소대장을 맡아 앞에서 소총을 만져보긴 했지만, 많은 훈련병들이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훈련을 끝냈다면 믿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나라가 위태로웠지만 총기 등 물품이 턱없이 부족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왜정시대 나름대로 공부도 했었고, 대구에서 중등교육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훈련병 가운데는 지식인층에 들었기에 소대장을 맡을 수 있었다. 훈련병 중에는 문맹자도 많았지만 다급하니 마구잡이로 징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주 훈련을 마치고 방위장교 인솔로 기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한없이 달려갔다. 내리고 보니 지금의 서울 이화대학교 자리로 그때가 서울 수복직후였다. 작문(作文) 잘 지은 덕에 행정병으로 후방에 배치 조교들이 전체 군인들에게 백지 한 장씩을 나눠 주고는 ‘현시대 우리의 각오’라는 작문을 지으라는 것이다. 나는 원래부터 작문에 약간의 소질과 취미를 갖고 있던 터라 단숨에 한 장을 채워서 제출했다. 작문 심사과정에 다른 동료 몇 명과 함께 내 작품도 채택됐다. 조교가 우리들을 따로 불러내더니 “너희들은 전방의 격전장이 아닌 후방으로 간다”고 발표해 놀랐다.

알고 보니 우리가 창설부대 구성원이었다. 각 부대별로 전후방의 격전지로 분류하고, 맨 마지막으로 우리는 김천에 주둔한 창설부대 본부로 배치되어 나는 부대행정과에 사무요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행정병이라고 해서 늘 책상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인민군을 격퇴했다고는 하지만 산속 깊숙이 그들의 잔당이 남아 있어서 공비 토벌이 주 임무였다. 우리 부대는 태백산지구, 소백산지구 등 군데군데 격전지에서 공비토벌로 많은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병들도 때때로 부대원들이 벌이고 있는 격전장에 투입, 작전수행에 동참했다. 죽을고비도 여러 번 있었지만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운이라고 봐야겠다. 훗날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부모님 덕분에 중학과정이라도 마쳤기 때문에 행정병으로 차출되는 특혜도 입었고, 사단 법무참모부 속기사로도 활동해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음을 상기해 본다. 한약사인 할아버지 따라 성주에서 고령으로 이주 한약사인 배 지회장의 할아버지께서는 성주 대가에 사셨는데, 고령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바람에 고령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배 지회장의 가족으로 부인 허태석(83, 김해인) 여사와 슬하에 4남2여를 뒀다.

“6·25가 나던 해 3월에 개진 구곡이 고향인 허 여사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으나 신행 전이라 겨우 처가를 세 번 정도, 그것도 잠간 다녀온 것뿐인데 전쟁터로 나가게 되어 신부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며 웃으신다. 당시는 결혼을 하고 1년 동안은 친정에 머무르다 시집을 가는 것이 우리의 오랜 풍습이었다. 석사학위를 받은 장남은 현재 한전에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고, 다른 자녀들도 모두 출가해 잘 살고 있어서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내외분은 고향집을 지키면서 이제는 힘에 부쳐 농사는 대부분 남을 주고 먹을 양식 정도만 직접 농사를 짓는다. 배 지회장의 형제는 5남1여로 배 지회장이 막내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막내를 결혼은 시켰지만, 전쟁으로 인해 며느리 얼굴도 못보고 죽겠다며 애를 태우시던 중 공무원에게 며느리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위는 군에 가고 없지만 안 사돈의 간절한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장인어른이 반운리로 딸을 데리고 와서 안 사돈과 상봉시켰다는 가슴 뭉클한 얘기가 전해진다. 참전유공자로 무공훈장 두 번 받아 올해는 광복 70년이자 6·25가 발발한지 65년이 되는 해여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발휘한 호국영웅들의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다.

배상규 지회장은 참전유공자로 1, 2차에 걸쳐 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으며, 가족계획법에 관해 순회 강사를 했었고, 반운동장과 예비군 개진중대 부대장 겸 소대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개진1투표구 선관위원장과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고령지회 감사를 거쳐 작년부터 지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