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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는 세상 기부 문화가 사회적 화두가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굴지의 대재벌들이 연말연시가 되면 수십억 원에서부터 수백억 원씩의 기부는 연례행사처럼 됐다.
재벌은 아니더라도 사회적 저명인사들이 퇴직을 하거나 은퇴하면서 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때로는 이 각박한 세상 훈훈한 얘기도 있다. 일생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오다 삶을 정리하며 기부하는 수백만 원에서부터 수천만 원도 있고, 그리 넉넉지도 않게 근검절약하여 겨우 집 한 채 장만해 살다가 종내는 자식들에게 물려주지도 않고 장학재단에나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것을 보노라면 이 끝없는 물신숭배의 세상에서는 미담이 아닐 수 없다.
근년에 와서는 공익재단 아너 소사이어티 클럽(Honor Sociey Club)에 1억 원 이상을 갹출하면 정회원이 되고 기부문화를 선도해 간다고 한다.
기부 예기가 나오니 얘기는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국내산 농산물만 취급하던 시장에서 수입산 농산물이 무제한 들어오니 경쟁만 심해지고 가계(家計)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생각다 못한 아내가 부업을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식솔들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내 무능은 생각지 않고 그 알량한 자존심이 우선 좀 상하고 아내를 생활 전선에 내보내는 듯해서 명확히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결행을 하는 것이었다.
단순 일급직(日給職) 노동이라며 5일을 다니더니 그만 몸살로 눕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안쓰럽고 그만 두라고 했더니, 몸이 말을 안 들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그만 해프닝으로 끝나버렸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 내 반대를 미리 예상이나 한 듯, 화 내지 말고 들으라는 것이었다. 공짜 돈(5일 일한 급료)이 생겼으니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라는 모금단체에 보내자고 하는 것이었다. 남 돕자는 일에 내 동의를 구하려고 한 정중한 아내의 제의가 평소 내가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동전 한 닢 맘 놓고 남 도와준 일이 없을 만큼 옹졸했다. 항상 부족하게만 살아오느라 인성도 정서도 메말랐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연말이 되면 이웃돕기 행사가 여기저기서 벌어져도 돌아섰고, 길바닥에서 동전 그릇 놓고 손 벌리고 구걸하는 사람 외면하기 일쑤였다.
내 아내, 변변한 외출복 한 벌 없으면서 남 돕겠다는 그 뜻이 놀라워 흔쾌히 허락했다. 다음 날 은행으로 달려갔다. 보낼 곳 구좌번호를 물으니 그 은행 여직원, 내 행색이 초라했던지 몰골을 살피며 입금표를 써주는 친절은 보였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내가 의외라는 느낌이 역력했다. 별로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쾌할 것도 없었다.
집에 와서 아내가 송금인은 누구로 했느냐고 묻기에, 그야 당연히 당신이라고 했더니 왜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야 물론 당신 돈이니까’라고 힘주어 말해주기도 했다.
아내는 또 책갈피 속에서 회원증 두 장을 꺼내는 것이었다. 하나는 큰애(당시 중학생) 이름의 “소쩍새 마을”이고 또 하나는 작은애(당시 초교생) 이름의 “천사원”이었다. 불우·장애자들의 시설이라며 각각 매월 1천원씩 낸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리곤 내 추인을 요구하는 듯 가볍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지하철 요금이 2백 원이었으니 1천 원의 가치는 단순비교만 해도 한 5천 여원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땐 자동이채도 없을 때이니 어떻게 냈으며 얼마동안 계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교육적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통해서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빈자 일 등 보다 부자 백 등이 더 인정받는 물량(物量)의 시대에 신문 성금란 톱(머리)을 장식하는 몇 억 원보다 내 아내의 기만 원이 내겐 더 값지고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기왕 아내자랑을 하는 김에 남이 팔불출이라 하건 말건 개의치 않고 더 해야겠다.
신혼 서너 달이나 지났을 무렵 사소한 일에 처음으로 내 뜻을 거역해 오는 것이었다. 밀월이라고 하기엔 정서적 여유가 없을 때였고 사치스럽게 여길 때여서 약간은 황당했으며 이른바 속물들이 말하는 ‘신혼 초 길 들이기’를 한답시고 밥상을 뒤엎는 만용을 부리고 만 것이다.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내 행위가 사려 깊은 아내에겐 먹혀들 리가 없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저항 하나 없이 조용히 수습하는 것을 본 나는 그만 머쓱하다 못해 기가 질리고 말았다. 아내의 무저항의 위력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잡힌 발목(?)이 얼마동안 큰 짐이 되었고 ‘길들이려다 길들게 된’ 어릿광대짓의 고백이 역설적이게도 아내 자랑이 되고 말았다.
금년(아마도 그때가 1995년 경 연말 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제야는 등 세 개(아내 등, 소쩍새 마을 등, 천사원 등)로 우리 집을 환히 불 밝히며 새희망 새 해를 맞으리라.
1995년 세모에< 저작권자 © 고령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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