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을 갓 지난 유월 하순 무렵의 마지막 토요일 밤이다. 아내와 저녁을 일찍 해결하고 신천 둔치에 운동을 나갔다. 초여름 밤이라곤 하지만 해가 아직 서산에 걸려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공원 벤치에 무연스레 앉아 있다. 오랜만에 아내는 아이들 이야기와 올해 태어난 둘째손자 이야기며, 세상 살아가는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변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내는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봇물 터지듯 계속 이어진다. 오늘의 보행 목표는 중동교에서 신천교까지 왕복 6Km를 걷기로 했다. 아직도 오리떼들이 먹이를 찾아 분주히 자맥질을 하고 있다. 황새 두 마리가 둥지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 신문에 신천 야생오리가 우여곡절 끝에 여덟 마리의 세끼를 부화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머릿기사로 실렸다. 중동교에서 신천교 사이에는 세 개의 보가 놓여져 있어 물이 깊은 곳은 한길이 넘어 보였다. 잰걸음으로 강가를 따라 걷고 있는데 물밑으로 검은 무리가 먹이를 찾아 몰려오고 있지 않는가.
가만히 보니 잉어 떼였다. 어른 팔뚝만한 자연산 잉어가 수십 마리 무리지어 유유히 먹이를 찾고 있다. 지난해 TV에 수달이 잉어를 잡아먹는 광경을 방영한 것을 보고 확실히 신천이 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달의 먹잇감으로는 안성맞춤인 잉어 수백 마리가 신천에 모여 산단다. 이웃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시청에서 방생한 것이 아니고 수질이 좋아져 낙동강에서 올라온 자연산 잉어란다. 하도 신기하여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운동은커녕 물고기에 관심이 쏠렸다. 혹시 야간에 낚시꾼이 잉어를 잡아가면 어쩌나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둑에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이곳에 낚시나 야생조류를 포획하는 사람은 벌금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가며 계속 걷고 있노라니, 잔잔한 물결이 저녁노을에 물고기의 은빛 비늘같이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아직도 황새 한 마리가 봇물 위에서 물고기가 차고 오르는 놈을 향해 자맥질을 하고 있다. 보 밑에는 갈대와 수초가 야생오리의 둥지를 틀기에는 보금자리주택이었다. 그 옛날 학창시절의 신천과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는 신천을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용두방천’이라고 불렀었다. 그때는 지금의 둔치가 모두 하천이었으며, 비가 많이 오면 방천이 터져 물난리를 겪던 때였다.
당시 외갓집이 지금의 희망교 근처에 있었고, 외할아버지를 따라 냇가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어릴 때 외가에 가면 툇마루에 앉아 옥수수를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외할머니 생각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헤아려보니 벌써 사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가면 방천 둑 바로 옆에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임시 판잣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시골에서 풍수로 남의 묘 터를 봐주고 조금씩 받은 돈으로 끼니를 연명하다가 6.25사변으로 고향을 떠나 대구에 피난을 와서 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밥 세끼를 해결치 못해 외할머니는 강냉이 장수를 해가며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다. 하기야 그때는 전쟁 후라서 다들 그러했겠지만….
그래도 우리집은 지을 농사라도 있어서 끼니 걱정은 없었지만 외가에 자주 가지 못하는 것도 아마 경제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가난을 후대에 대물림하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왔지 않았는가.
지금의 신천은 그동안 수차례 물난리를 겪은 후에 튼튼한 제방을 쌓아서 둔치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아득한 옛날 가재 잡던 추억은 옛이야기로 변해 버렸다. 당시는 희망교가 징검다리로 겨우 건너다닐 정도였으니까.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은 그 자리에 동서로 가로 지르는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가 도도한 자태를 뽐내듯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만큼의 시간들이 한 줄기 바람 되어 훌훌히 흘러갔다.

불혹의 초년 시절이었던가. 상주의 강변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학교 사택에서 살림을 할 때의 일이다. 막내 아이가 젓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입술이 뚫려 병원에 꿰매러 가야 했다. 밤중에 뱃사공이 없어 아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남매를 다 키워 손자까지 본 즈음, 옛날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명절 때면 아기 셋을 등에 업고, 품에 안고, 걸려서 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만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시절을 생각하니 꿈을 꾸는 거짓말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나 할까.

세월 앞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삼남매 키울 때는 옆 돌아볼 시간조차도 없었지만, 그 삼남매가 모두 다 출가하여, 아들 딸 낳아 정신없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옛날 모든 것이 불편하던 시절에 어떻게 세파를 헤쳐 나왔는지 추억의 편린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롱거린다.
아이 셋을 키울 때의 아내는 억척같았다. 지금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많이 약해졌지만 눈물만큼은 더 많아진 것 같다. 요즘 TV 연속극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옛날에 비하면 훨씬 많아졌다. 나이를 더해가면서 눈물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은 왜일까.
옛날부터 여성들은 눈물이 많아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남자에 비해 장수한다는 것이다. 우리 남성들도 모임에 나가 수다를 떤다든지, 많이 울 수 있는 모임을 조직하면 어떻겠는가.

공원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청둥오리 한 쌍은 둥지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다. 어둠살이 끼기가 바쁘게 가로등이 일시에 켜진다. 우리부부도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처럼 서서히 유영하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