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알면은 몇 뱅년을 살알깅잉데에..’하는  옆집 할머님의 구성진 노래 가락을 듣고 싶다.  무엇이 바쁘신지 구정(舊正) 보내려 대전(大田)으로 가시더니  아직 무소식이다.  물론  몸이 불편하시거나 입원을 하셨다 해도 나에게 따로 기별(寄別)이 올 리도 없으련만  괜히 마음만 울렁이는데,  최소한 돌아가셨다면 이곳에 할머님의 남편이  잠든 언덕이 있고 선산(先山)이 있으니 장례행렬(葬禮行列)이라도 오련만 아직 연락이 없으니 살아 계신 듯하다.
구순(九旬)을 눈앞에 두고서도 부지런하시기가 여간 아니기에  새벽 기도 후 귀가 길에  마주 하던 기억과 지난해 이곳으로 둥지를 옮길 때  ‘두릅’이라는 향기 짙은  봄나물을 채취하는 법과  무침 하는 법(?)을  비롯한 데치기법 등  당신의 음식물 준비법을 정말 상세하고 자상하게 설명하곤 하시던 할머님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꼭 보드랍게 내리고 있는 봄비 소리 때문일까?
풀잎 자라는 소리를 말하면 모두들  ‘예술가적인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소리’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있지만 筆者는 요즘 풀잎 자라는 소리로 잠을 설치고 있다. 지난 가을에  앞의 할머님이 알려 주신 방법으로 ‘봄동 배추와 시금치 그리고 시네나빠’ (무잎처럼 생긴 봄채소이며 아마 일본에서 종자 개량하여 보급된 듯 이름이 일본식인 채소) 가, 눈이 녹아들던  지난 달 말까지만 해도  색조만 짙어 질 뿐 모양새가 영 아니 올시다이더니  요즘은 아주 힘차고 굳세게 마늘밭 고랑을 다 매우고 있다.  무슨 모양새 낸다고 이렇게 심었던 것이 아니라  잘 모르니 심고 또 심고하다 보니  채소 자체가 무슨 꽃밭모양으로 구성된 것이 보기에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정말 먹을 요량으로  내가 채소들을 심었던 것은 아니지만 , 시새움을  내야 할 정도로  할머니께서 심어놓고 가신  채소밭의 채소들은 아주 건강하고 정돈 잘된 모양으로  푸른빛이 짙어져서  검은빛을 띠기 시작하는걸 보자니 할머니가 그리워(?)지면서,  인천에 가신 어머님의 안부를  새삼 묻고 싶어지는 것이  마음의 병이라도 되는 양  가슴 한쪽이  아려오고 있다.  내 가슴이 아파보니 풀잎(채소) 자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밤이면 더욱 그 소리가  군(軍)  행진 소리처럼 규칙적이고 크게 들려오고 있다.  바람도  추운 겨울엔 ‘휭 휭’하고  울어 되더니,   봄이라고  겨우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지나가고 있어서 채소 자라는 소리가  더욱 잘 들리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개(犬)란 녀석이 콩콩 짖어서 잠깐씩  채소 자라는 소리를  놓치게 하곤 한다.
눈을 감으면  채소들의 소리를  그릴수도 있을듯하여 먹물 색 바랜  볼펜 한 자루를 붙들고 씨름을 시작해 보았다.  역시 막상 시작하니 들리지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아서 채소 자라는 소리를  놓칠 듯한 불안이 엄습해왔다.
“아아  이 봄에  채소 자라는 소리 한 자락을 얻으려고  상당한 기대를 했었건만,  별빛이 나를 초라하게 내려다보고 있음만 인식하고  지내러나 하니, 정말 몸부림쳐서라도  풀잎 자라는 소리를 그려보고자 했던  그 추운 세월이 다시금 아려오기 시작하였다. 식물은  수분이 있어야 자란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개울가 물 흐르는 소리를 붙잡아 보아도 경칩(驚蟄) 지난 개구리 소리를 등에 업은 물소리는 너무 크고 웅장하여 내 가슴을 박차고 나가 저만큼 앞서 가고 있고  나의 가슴은  풀잎 자라는 소리는커녕 밤이슬 내리는 소리도 붙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  올봄도 어느 큰 시인처럼 풀잎 자라는 소릴 못 그리고 지나가나 보다.   올 리도 갈 리도 없는 첩첩 산중의 노래를 풀잎 자라는 소리로 불려보고 싶었는데  그냥 가나보다.
내 눈은 벌겋게 달구어져 가다가  고인돌 뚜껑처럼 무거워져 내려 닫혀만 가지만, 이제 어느 곳으로 투망(投網: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소형 漁具)을 던져야 할지조차  막막하다. 
“깊은 곳에 던져라” 하시던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 내는 작은 재주는 있지만  역시 어느 곳이 깊은 곳인지 종잡을 수 없으니, 오  큰 분이시여 나의 무지를 용서하소서.
벌써  먼 동녘이  움직이는지  나의 유일한 벗인 개(犬)조차  나의 모습이 애처로운지 고개를 자신의 가슴팍에 들이 밖은 모양으로 자고 있다. 그러면서도 귀(耳)는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개를 가까이서 키워보지 않았던 이는 개가 지금 자고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 저것이다. 개란 큰 공동체는 편히 쉬고 있지만  귀란 개체는 자기의 몫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음으로 개란 이름이 존재하는 것이구나.
아아  불쌍한 사람아,  어찌하여 자기의 아주 작은 몫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면서  이 우주 만물보다 웅장한 ‘채소 자라는 소리’를 그리겠다고 뜬 구름 잡는  모양새를 하였는고?  비온 뒤나  아침 물안개 피어오르는  산 능선에 아름답게 걸려 앉아있던 구름을 가까이서 잡아보거나 타본 사람은 ‘손오공’ 말고는 없을 터이고, 정작  물안개 속에 있던 시절은 습도가 높아서 농작물 재배조차 난감하던 눈물겨운 하소연을 기억이나 하셨던고?
그러나 이미 왔으며, 오고 있으며,  또 결국은 오실 나의님이시여!  
나의 팔이 짧아서  당신을  안을 수 없아오며  당신을  받기는커녕  면대조차 어려운 처지를 아시오니,  ‘풀잎 자라는 소리’가  아까우시다면 ‘안개 내리는 소리’나   하다못해  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소리라도 들려주고, 큰 바위 얼굴을 찾아 허둥지둥 하다 보니 자신이 또 새로운 주인공의 큰 바위 얼굴로 비쳐지는 현실의 무거움을 조용히 명상(冥想)으로 닦아 내는 지혜를 슬쩍 던져주심 안되겠습니까? 
내 가슴에만  곱게 들어와 앉아 있는 ‘채소 자라는 소리’와 ‘봄의 소리’를  그리지 못하고 노래하지 못해도 당신이 있어 감사함을  보듬게 함을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진하게 불려 보려고 한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