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교는 밤에만 문을 연다. 이름하여 야간 국민학교, 주소는 대구시 수성구 파동 일번지이다.
이 학교 역사는 내가 대구로 이사해 오면서 처음 보았으니까 20년이 넘을 것 같다. 학생 수는 들쭉날쭉 한다. 어떤 날은 교실이 비좁아서 운동장을 임시 교실로 활용하고 어떨 때는 결석생이 많아 텅 빈 교실에 한두 명이 앉아 공부 할 때도 있다. 학생이 많을 때는 전교생이 40명이 넘을 때도 있다.
이 학교는 무학년제이며, 나이 분포는 20대에서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이다. 여학생은 몇 명 안 되고 주로 남학생이 많다. 저녁 6시에 문을 열면 밤 12시에 문을 닫는다. 교육과정은 인생철학이 주 교과이며, 간혹 흥이 나면 음악 공부도 한다. 시간표는 매우 다양하다. 1)‘소백산맥’에다, 1)‘오대양 1)육대주’의 과목이 많다. 부교재 또한 다양하고, 문어, 낙지, 꼼장어, 돼지고기, 곱창, 파전, 빈대떡 등등 없는 것이 없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주로 서민층이 많으며, 공무원들도 퇴근 시간이면 더러 더러 온다. 간판 이름이 특이해서 몇 년 전 친구와 일부러 한번 간 일이 있다. 원탁형 탁자에 삥 둘러 앉아 한가운데 연탄불 피워 놓고 소주 한잔 걸치고, 꼼장어 구워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수업이 시작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말이 많아지고 수다가 이어 진다. 서로 내말 좀 들어보라고 책상을 쳐가며 목성을 돋운다. 이곳에 가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가 있고, 신문과 TV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떤 학생은 자기 신세타령을 하며 “이 망할 놈의 세상! 천지가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느니, “국회의원 뽑아주었더니 쌈박질이나 하고 지랄들이야…….” 취기가 더해 갈수록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일과이다. 선거철이면 누가 당선되고, 누가 낙선될 거라는 예측도 여론조사를 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 나라 정치는 이곳에서 다 이루어지고, 인생철학이 다 녹아있는 곳이 바로 이 학교이다. 거나하게 취해서 흥이 나면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랫가락이 흐르고, 육자배기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40여 년 전 초임교사 때 상주의 어느 시골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갈령재! 오르막길 십리, 내리막길 십리의 험한 산을 넘으면,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는 하늘아래 첫 동네이다. 면소재지에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학교는 분교로 있다가 본교로 금방 독립한 학교이다. 교문 앞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참으로 전경 좋은 학교였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학생 야영장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오지학교 치고는 학부모들의 인심 또한 좋은 곳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스물한 살, 입지(立志)의 나이에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첫사랑을 시작할 때와 같은 순수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발령지인 이곳에 부임하니, 모든 것이 낯설고 물 설은 생소한 곳이었다. 총각선생 두 사람이 하숙집을 구하여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첫 월급이 14,600환이었고, 하숙비는 2,000환을 지불한 것 같다. 고향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불편해서 자주 가지 못가고 공휴일이면 면소재지에 이발도 하고 고기도 구어 먹으러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네에서는 총각선생이 왔다고 밤마다 처녀들이 구름 몰려들 듯 하였으며, 하숙집 주인 방에 처녀들과 어우러져 화투놀이를 하여 벌칙으로 손목 때리기와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학부모 인심 또한 좋아서 농산물 수확 철이면 과일과 고구마, 감자 등 농산물을 학생 편으로 한보따리 보내주곤 했다. 동네에서 회갑, 잔치는 물론 조그마한 기제라도 있으면, 방과 후 초대가 왔고, 전 직원이 방문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받곤 했다. 나는 전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는데 선배선생님들께서 술을 못하면 일도 잘 못한다며 권하는 바람에 억지로 먹다가 과음으로 토하던 일도 비일비재 했다. 술자리가 벌어지면 반드시 유행가 한마디씩은 해야 자리를 떴고, 밤이 이슥하도록 유흥을 즐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유행했던 노래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과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였다. 남자 가수로는 최희준의 ‘하숙생’, 남일해의 ‘이정표’가 유행했고, 나훈아와 남진이 쌍벽을 이루었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난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한번 들으면 방금 따라 부를 수 있는 천재적(?)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술자리에 앉으면 100여 곡은 즉흥적 생음악으로 부를 수 있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주말이면 몸보신하고, 목욕과 이발도 할 겸 면소재지 식당에 자주 가곤 했다. 그 시절은 말이 식당이지 밥은 팔지 않고, 술만 파는 술집이었다. 식당마다 아가씨 두 명은 기본이었고, 다섯 명까지 둔 식당도 있었다. 당시는 담배 경작하는 농민들의 호주머니를 넘보기 위한 식당 주인들의 농간이었다.
총각 두 사람이 막걸리 안주 하나 시켜놓고, 아가씨와 젓가락 장단에 맞춰 밤이 이슥하도록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때 내가 모시던 교장선생님의 십팔번은 남일해의 ‘이정표’였고, 내 십팔번은 ‘첫사랑 마도로스’ ‘이국땅’ 그리고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이었다.
그 당시 막걸 한 되가 600환이었으며, 주전자가 다 찌그러져 반쯤 술이 담겼어도 누가 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술 한 잔 먹어도 아가씨 옆에 앉혀놓고 노랫가락 한마디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때였다. 그리고 물가가 그렇게 싼 시대는 내 기억으로는 처음인 것 같다.
한 달에 한번정도 읍내에 출장을 나오면 미리 하루 전 나와서 여관에 자고 이튿날 교육청 회의에 참석했다. 매달 월급날이면 회계 사무를 담당해서 학교 아저씨와 같이 출장을 오곤 했다. 읍에서 하루를 묵을 때는 저녁 때 으레 술집 골목을 찾았고, 막걸리 한 되를 먹어도 아가씨 옆에 앉혀놓고 유행가 십여 곡은 부르고 나와야 직성이 풀리던 시대에 살았다.
그 이후 읍내 학교로 전근해 와서도 동 학년 끼리 퇴근 후에는 2차, 3차, 5차까지도 술집을 찾아 인사불성이 된 일도 기억이 난다.
누가 세월을 소리 없는 폭군이라 했던가. 강산이 네 번 바뀐 지금 옛 추억을 생각해보니, 꿈만 같던 시절이었고 하루의 고단한 피로를 막걸리 한 사발과 노랫가락 한소절로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 보내던 옛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수필가 피천득님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추억을 많이 가진 자’라고 하였다. 지금도 옛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탁주일 배하며 흘러간 노랫가락 장단 맞춰 불러 봤으면 하는 그리움에 추억을 되씹어 본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 첫 부임지에서 아이들과 운동장에 돌을 캐내며 운동회를 열었던 젊은 날의 열정이 까마득한 추억으로 남아 뇌리를 스쳐갈 때 지나온 날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고이고이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가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수성못 근처에 있는 야간 국민학교를 찾아 대포 한 사발에 빈대떡 한 점 걸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