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신천 둔치를 걷고 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비둘기 한두 마리가 다가오더니 어느새 떼거리로 모여든다. 새우깡 한 봉지가 금세 바닥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이엔 끈끈한 정이 이어진다. 무리들 중에는 겁 없이 가까이 다가오는, 유난히 빨간 발가락을 가진 한 쌍의 비둘기가 있다. 꾹꾹 고개를 숙여 인사도 잘한다.

몇 해 전으로 생각은 되돌아간다.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에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택시기사 부부가 살고 있었다. 유달리 배가 불룩 나온 건장한 체구의 남편에 비해 부인은 빼빼마른 몸매를 지녔다. 매일 한밤중이면 여자의 앙칼진 음성이 이웃들의 잠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 잦았다. 남자의 험악한 고함 소리가 베란다를 타고 넘어오고 금방이라도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살림살이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울음소리와 함께 뒤엉키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해지는가 하면 이내 여인의 비명소리가 창밖으로 흩어졌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다가 오래도록 정적이 감돌면 부부 전쟁은 거기서 일단락된다. 다음 날 출근 시간에 그들 부부와 마주지게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건네 온다.

억겁의 인연을 가진 부부가 만나 백 년도 살지 못하면서 서로 다투는 감정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한참 후에 안 일이지만 남자의 잦은 외도 때문이었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씨앗을 보는데 가만있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그들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웃들도 싸움소리에 만성이 되어 점점 신경이 둔해져 갔다.

윗집 베란다에는 유난히 발가락이 빨간 비둘기 부부가 살고 있었다. 에어컨 환풍기 구석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했다. 그 집 여자는 매일 아침 비둘기 배설물을 청소하면서 심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주인의 지청구가 참을 수 없었던지 비둘기는 우리 집 베란다로 이사를 왔다. 나는 금슬 좋은 빨간 발가락의 비둘기 부부가 안쓰러워 판자로 핑크빛 나는 예쁜 집을 장만해 주었다. 동물들도 자기들을 사랑해주는 낌새를 아는 모양이다.
알을 낳아 품고 있을 때면 수컷은 먹이를 열심히 물어다 날랐다. 보다 못해 먹이통에 옥수수 알갱이를 가득 채워주곤 했다. 어린 새끼가 태어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만들어져 결속력을 다진다. 어미 새는 새끼들의 배설물을 입으로 받아서 멀리 내다버리는 수고도 마다않는다. 그리고 새끼들에게 먹이도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 이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 세계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아마 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오묘한 선물을 주셨는가 보다.

옛날부터 동물 세계에서 금슬 좋기로는 원앙새를 꼽는다. 원앙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우리 사람들보다 금슬이 더 좋은 것 같다. 내가 키우던 비둘기 부부도 유별나게 사이가 좋았었다.

해가 바뀌었다. 위층 집에서도 부부싸움이 그쳤다. 평화가 찾아온 걸까, 휴전협정이 맺어진 걸까. 두 부부는 사이가 돈독해졌다.

이듬해 어느 봄날, 우리 부부는 찹쌀떡을 사들고 윗집을 찾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고, 지난 한 해 동안 이웃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튿날 우리는 새로 태어난 빨간 발가락의 비둘기 2세를 핑크 빛깔의 예쁜 집에 넣어 윗집에 분양해 주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그렇게 살벌했던 가정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봄이 찾아들었다.

아침 조깅 발걸음을 재촉한다. 비둘기 떼가 나를 자꾸 따라온다. “후여”하고 쫓아 본다. 유난히 발가락이 빨간 비둘기 2세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내가 분양해준 저 비둘기처럼 그들 부부에게도 평화가 지속되길 마음속으로 빌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