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지금은 모든 것이 단잠에 빠져 있는 깊은 밤중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가 이십여 년 전 꼭 이맘때였지요. 그때를 생각하며 이 밤에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그때 갓 예순을 넘기셨던 아버지,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처럼 당신께서는 새로운 동반자를 들여놓길 원하셨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결국 아버지에게서 떠나 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제 자신이 두려웠습니다.
겉으로는 참 잘된 일이라며 마음에 없는 말씀을 드릴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진정으로는 도저히 그리 될 수 없었음이 가시로 찌르듯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는 묵은 유행가 가사에서처럼, 아버지를 따르자니 저의 마음이 울고 저의 마음을 따르자니 아버지가 우실 것 같아 가슴앓이가 자심했습니다. 저는 그 때 사람이 어떻게 늙어 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황혼인가를 생각하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지 수없이 고뇌해 왔던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똑 떨어지는 답은 없을 터이지요. 사람마다 세상살이의 방식이 다르고 살아 온 환경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불효막심한 줄 알면서도 그때의 상황으로서는 도저히 당신의 뜻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못했음을 지금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그 일차적인 이유였겠지요.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삼십 수년간을 류머티즘신경통이란 고질병으로 고통 속에 헤매며 애면글면 살다 가신 어머니가 아닙니까. 그 어머니가 너무 가엾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까닭은, 단란한 가정에 새사람을 들임으로써 혹여 평지풍파를 일으킬지 모를 그 불행의 씨앗을 심을 날이 올 것도 같은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라는 말이 오히려 맞을 성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솔직한 표현으로 순전히 우리 자식들 위주였던 게지요. 그로 인해 겪으실 당신의 외로움 같은 건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시쳇말로 열 명의 효자보다 한 명의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생겨난 것인가 봅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요. 이제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만한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저의 마음도 많이 평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못다 한 효도에 대한 뉘우침으로 바뀌고, 열없이 흘린 눈물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아버지 또한 외로움에 대한 저항력이 그 세월의 부대낌에 의해 웬만큼은 길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흘러간 과거가 된 지금, 한편으로는 어쩌면 그때의 선택이 오히려 옳은 판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을 들여 잘되면 모르거니와, 잘못 돼 속 썩이느니 차라리 가까이서 친구처럼 사귀며 지내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세상 무엇이든 베일에 싸여 있을 때는 다 좋아 보이지만, 너무 가까워 그 베일이 벗겨지고 나면 신비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볼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데 대해 아버지도 아마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경위야 어찌되었건, 저의 외고집으로 인해 당신께서 까만 밤을 홀로 하얗게 밝히셨을 숱한 나날들의 외로움을 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불효에 머리 숙여 속 깊으신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 일기日氣가 고르지 못한 계절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늘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두 손 모두오고 빕니다.

 당신의 큰아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