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동산의 가을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로 깊어간다.
채 먼동이 터 오기 전 어슴새벽, 뭇 생명들은 아직 지난밤의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단잠에 빠져 있다. 연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야트막한 구릉을 이리저리 누빈다. 그러다 보면 예서 ‘툭’, 제서 ‘투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만난다. 그 소리는 정적에 싸인 동산의 새벽을 깨운다.
불현듯 살아있음에의 자각이 찌르르 온몸을 타고 감전돼 온다. 아득한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전설 같은 음향, 먼 옛날 우리 앞서 세상에 왔다 떠난 그 누군가도 필시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서 끝내 풀리지 아니할, 삶과 죽음이란 수수께끼에 골똘했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희붐하게 동녘 하늘이 밝아 온다. 비로소 쭉정이와 알맹이의 구별이 확연해진다. 언제 와 계셨는지, 나와 조금 사이한 곳에서 할머니 한 분이 밤새 떨어진 알맹이들을 부지런히 자루에 주워 담고 있다.
저 할머니는 어찌 저리도 손놀림이 잽쌀까. 은근히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며 찬찬히 할머니 모습을 살핀다. 언뜻, 할머니의 꼬부라진 허리가 도토리 줍는 데는 딱 안성맞춤이겠다는, 죄송스럽지만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그랬다. 도토리 줍기의 요체는 다름 아닌 눈높이에 있었던 게다. 무릎을 예각으로 바짝 굽힌 상태에서 시선을 가능한 한 지면에다 최대로 내리깔아야 한다. 용변을 보듯이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는 크게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시선이 땅거죽과 일직선상에 놓일 때, 여기저기 구슬처럼 흩어진 올망졸망한 알맹이들이 비로소 한눈에 들어온다.
결국 눈높이를 낮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도토리 줍기의 효율성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비법인 셈이다.
느닷없이 생의 의미 하나를 붙든다. 사람살이에선들 무에 다를 것이 있으랴. 순간, 지금껏 얼마나 높은 곳만 올려다보며 살아왔던가를 뉘우친다. 눈높이를 높일 때 쉽사리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돈, 권력, 명예, 직위, 이런 등속의 뜬구름 같은 것들뿐이다. 구름이란 실체가 없기에 얼마나 모이고 흩어짐이 변화무쌍한 존재인가.
자고 나면 “억”, “억” 하는 도도한 외침에 파묻혀 한 끼 먹을 것에 목을 매는, 소외되고 상처 받은 이웃들의 소리 없는 절규를 우리는 듣질 못한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비정하고 삭막해져 버린 것은, 분에 넘치게 높아져 버린 우리들 모두의 눈높이에서 연유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행복은 크고 화려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데 있는 것, 눈높이를 높이면 이 작고 소박한 행복을 놓치기 십상이다.
눈높이란 높이면 높일수록 행복이라는 이름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마는 희한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눈높이와 행복지수는 기막힌 반비례 관계를 이루는 것이란 사실이 새삼 깨쳐진다.
욕망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따라 상실감도 그만큼 깊어지는 것이리라.
더위로 인한 갈증은 한 모금의 물로 풀 수가 있지만, 욕망으로 인한 갈증은 그 무엇으로도 풀 수가 없다.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은 다 채울 수가 없다고 한 법구경의 말씀에서처럼, 채워도 채워도 끝끝내 만족이 없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타고난 욕망이므로.
무작정 높은 곳만 치어다보려 하지 말고 낮은 곳을 내려다볼 일이다. 세상에는 번듯하고 화려한 삶보다는 그늘지고 상처 받은 삶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낮은 곳으로 눈길을 줄 때 나보다 약한 이,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이 도토리처럼 비로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며 그렇게 살아갈 일이다.
‘툭’, 갑자기 등 뒤에서 도토리의 낙과성落果聲이 둔탁하게 들려온다. 고요를 깨뜨리는 그 원시의 울림이 눈높이를 낮추고 살라는 절대자의 계시인 양 귓전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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