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겨울 값 한다고  눈이 제법 내렸다. 중부지방 이상의 지방이야 하도 눈이 많이 오고 자주 오니까 귀찮고  여차하면 위험요소를 보이는  존재이겠지만, 남부지역인 이곳은 눈이 알맞게 오니 내년 농사에 큰 도움이 되는  수량(水量)공급의 주인공이니 고마운 존재라서 옛날 아니 우리네  할머님들은 ‘눈 손님 오시네’라고 하면서  눈(雪)을 상당히 경이롭게 맞이하시는 걸 내 어린 시절에는 자주 보아왔다.
눈도 종류가 상당히 많다.  그 많고 많은 눈(雪)중에, 그 장정은 ‘꽃눈’과 ‘함박눈’을 매우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여기서 말하는 꽃눈은,  식물의 꽃눈 잎눈하고 분류하는 꽃눈이 아니다.  삼십여년전의 초겨울 어느날,   어느  한 入營壯丁(입영장정)이 논산훈련소 기본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양구 소재의  어느 부대로 이송되던 열차의 차창을 통하여 보았던  나뭇가지에 조롱조롱  맺혀있던 그 눈이 동결된 꽃눈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눈(雪)이,  나뭇가지에 달려서 햇살을  한입 가득히 머금고 살포시 웃으면서 영롱한 빛깔의 노래를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후송 담당관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가면서 그 장정은 그 꽃눈에게 많은 부탁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정리되지 않았던 산골 논, 천수답에 가까운 좁은 농토를 천직인양 온힘을 다하여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안부를,  애틋한 정을 나누던 애인의 기다림을,  전통적인 유교 가문의 후손인 집안에 처음으로 ‘하나님이란 다소 낯선 그분의 아들’이 되기로 작정하고  신학대학에 늦깎이로 다시 진학한 형의 안부도,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열손가락으로 이루 다 셀 수 없었던  많은 사연들을 그 꽃눈에게  부탁했었다.
당장 어느 부대로 갈지? 보사부장관의 면허는 있지만  후방기 전문교육을 받지 않아서 혹여 소총수로 가는 거는 아닌지? 등으로 머리가 아플 틈도 없이 걱정이 앞선 그때에 말이다. 어느 영화에서 눈보라 속으로 끌려가면서 멋진 웃음을 함께하며 애인의 안녕을 빌어주던 그 남자 (배우)처럼 말이다. 
그 장정은 순간의 그의 모든 인생을 다 받쳐서 꽃눈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그였다면 당연히 그의 주님에게 부탁했겠지만, 당시 그의 모든 생각은 모두 그 꽃눈에게 맡기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미지의 세계 軍이라는  특수집단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그 장정은 그것 밖에 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삼십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장정의 막내아들도 군 복무를 이미 끝내고 건장한 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장정은 오늘 아침에 눈을 보면서 문득 왜 그 열차에서 본  꽃눈을 기억해 냈을까?
그 장정이 좋아하는 ‘함박눈’은, 딱히 무슨 動機(동기)도 없었지만, 그의 할머님이 좋아 하셨고 그의 어머님의 기쁨이었으니 숙명처럼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이의 할아버님이나 아버님도  경상도 남자라서 속으로 말해서 그렇지 사실은 좋아한다고 말한 것 보다 더 좋아 했을 것이라고 믿어도 크게 낭패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함박눈은  우선 부드럽다.  내리는 순간에  입으로 들어가도 차갑지도 않고, 못생긴 애인 하나 없는 옆구리 시린  나홀로족이라도 함박눈이 오는 늦은 오후에는 歸家를 서둘 필요가 없다. 군고구마 한 봉지 사서 한입 배시시 먹고,  나머지는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 주어도 웃으면서 받아먹을 것 같은 벅찬 기쁜 감정을, 내 작은 가슴이 터질 정도로  꼬깃꼬깃 불어 넣어 주기 때문이다.
옆사람이 지나가다 어깨를  툭 부딛쳐도 ‘오 예 브라보’하고 웃을 수 있을 것 같고, 내일 납부 마감일인 전기세요금을 노동자의 기분 맞출 막걸리와 김치 쪼가리 값으로 사용해도, 어쩜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화내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을 주는 날씨가 함박눈 오는 오늘과 같은 날이라고 그 장정은 믿고 있다.
물론, 손으로 받아보면  정나미 없이 오줌만 누고 도망하는 친구이지만, 함박눈은  겨울 가뭄을  달래주고  보리뿌리의 미소를 잉태하는,  어느 가발가수의 노래인 ‘내 누이’같은 포근함을 주는 것이다.       
요즘이야 음성전화와 영상전화를 비롯한 무수한 매체들이 꾸역꾸엮 기어 나와서 안부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소식을 전하고, 지식을 나누고, 재산을 관리하고, 인맥을 남몰래 구축하고, 사랑을 나누고들 있지 않은가?  이렇게 함박눈이 오는 날에는 무서운 오빠의  감시도 따돌리고,  얄미운 올케의  안테나도 피하면서, 만나기는커녕 안부조차 바빠서  알길 없는 어렴풋이 잊혀져가는 옛날 첫사랑의 그 머슴애 가슴팍이를 마시고 싶은 젊은 아낙의  날뛰는 생각을, 약간은 멍하다고 자타가 말하는 그 장정도  알 것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 오면서, 나도 모르게 남에게 힘들게 한 일은 없는가? 눈물 흘리게 한 일은 없는가?  죄 지은 것은 없는가?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아버지가 보고 계신다던데 내 잘못이 있다 해도 지금처럼 함박눈이 오는 날이면 모두가 용서되리라 싶은 것이 그 장정 혼자 만의 착각일까?
그래서 그 장정은  꽃눈과  함박눈을 많이 좋아하는 것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