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해 달력도 달랑 한 장 남았다. 또 한 해가 기우는가보다. 징글벨 소리가 사라지면서 며칠 뒤면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게다. 한 해를 보내는 끝자락에 서서 조용히 가는 해를 붙잡아 본다.
거꾸로 매달아도 가는 것이 세월이라 했던가. 토끼해라서 그런지 세월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해마다 이맘때면 각종 모임이나 망년회로 식당가는 붐비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입맛이 어릴 때 즐겨먹던 음식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연말 모임이나 결혼식 뷔페에 가면 젓가락이 자꾸만 그 쪽으로 가게 된다. 퇴직을 하고 집에서 식사를 많이 하기에 아내가 채식위주로 식단을 짜니까 내 입맛에 맞아서 좋다. 가끔씩 외식을 할 때도 옛날에 먹던 토속음식집을 자주 찾는 편이다.
문득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옛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 하도다.’/
그렇다.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집에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아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초가삼간에 나물 먹고 사는 사람만 못하다는 뜻 일게다.
세월의 수레바퀴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본다.
이른 봄 온갖 산야에서 캐온 봄나물 맛은 강산이 여섯 번 바뀐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다. 달래, 냉이, 쑥, 씀바귀 등 온갖 산나물들……, 보리밥에 냉이와 달래를 넣어 끓인 된장국이며, 여린 잎을 뜯어와 콩가루를 풀어 끓인 쑥국 맛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진미를 모르리라.
초근목피 시절, 양식이 부족한 춘궁기에 쑥이나 시뭇잎을 뜯어와 밀가루에 버물어 밥 위에 쪄서, 밥 대용으로 한 끼를 때우곤 했다. 오월 단오 때면 쑥을 뜯어와 곱게 빚은 청절편이며, 콩고물에 무친 쑥떡 맛은 나무칼로 귀를 베어가도 모를 정도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심심산천에서 뜯어 온 온갖 산채를 고소한 참기름 간장에 비벼먹는 비빔밥 맛은 또 어떠한가. 삼동초 겉절이를 멸치, 두부 넣어 끓인 된장에 비벼 먹으면 고기반찬이 이에 견줄 수가 있으랴.
여름이면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쌈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으면 그 또한 별미가 아니던가. 춘궁기에 양식이 떨어져 보리가 익기 바쁘게 베어와 디딜방아에 찧어 지은 새까만 보리밥을 푸성귀에 비벼먹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가을이 오면 또 어떠한가. 늦가을 싱싱한 무청을 깔려와 끓는 물에 슬쩍 대쳐 고추장 넣어 더운밥에 한 양푼이 비벼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그 뿐인가. 가을배추와 온갖 푸성귀에 된장 넣고 쌈을 싸서 먹으면 꿀맛 그 자체였다.
겨울에 접어들면 온갖 젓갈로 버문 김장김치 한 가지만 있어도 밥상은 푸짐하다. 한 겨울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땅 깊이 묻어둔 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오장육부가 서늘하고, 늦가을 담아 둔 총각김치 맛은 또 어떠한가. 무의 짭짤하고 달콤한 맛은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지 않던가. 정월 대보름, 찰밥에 아주까리 말린 잎이며, 고사리, 도라지 등 산나물들을 고소한 참기름에 무쳐먹던 맛은 우리의 것이었기에 더 깊은 맛이 난 것 같다.
다산과 풍요로운 토끼해가 다 가기 전에, 그 옛날 향수에 젖어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신토불이 음식을 허리끈 풀어놓고 실컷 한번 먹고 싶다. 초원의 토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