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공연을 알리는 안내문이 전자우편으로 날아들었다. 실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연극 소식인가. 점령군처럼 위세를 떨치는 뮤지컬에 밀려 좀처럼 괜찮은 연극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연극’이라는 말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 낸다.
첨부파일을 열었다. 칠팔십 대로 보이는 두 남녀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황혼 빛을 받으며 저 먼 허공 쪽을 응시하고 있는 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질역’이라는 큼직한 제목 아래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동행’이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다. 가슴 깊숙이 고여 있던 감성을 펌프질하는 글귀가 불현듯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해질역>, 제목에서부터 벌써 아득히 흘러가 버린 세월의 내음이 진하게 배어난다. 틀림없이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든 주인공이 무슨 가상의 기차역을 배경으로 펼치는 허허로운 인생 이야기이리라.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눈가에 아스라이 멀어지는 열차의 뒷모습이 흐려져 온다.
연극을 만나러 단숨에 공연이 열리고 있는 소극장으로 달려갔다. 무대 전면에 황톳빛으로 물든 ‘해질역’이라는 이름의 텅 빈 지하철역이 펼쳐진다. 생의 나그넷길 끝자락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 언덕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는 전환점으로서의 역이라는 함의를 지닌 ‘해질역’, 머리에 서리꽃을 인 주인공 여옥주는 역무원도 없는 플랫폼에서 노인 무임승차권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 때 스무 해 전에 사별한 남편 차만식이 혼령이 돼서 그녀를 찾아온다. 남편 만식은 생전에 유교적인 가부장제도의 전형이었던 인물이다. 아내에게 온갖 구박을 한 것도 모자라 첩까지 두고 딴살림을 차려 있다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조차도 아내 곁이 아닌, 첩의 집에서 맞이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아내 위에서 군림해 온 남편이었으니 아내인 옥주에게는 쌓이고 쌓인 한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옥주는 살아서 무심했던 만식이 못내 서운하고, 그래서 그에 대한 원망이 가슴에 사무쳐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의 세계에 들어간 이상 이제 와서 그를 붙들고 따지거나 부아를 터뜨리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지 않았는가.
극은 깊은 강물 같은 그녀의 슬픔이며 한을 징징대지 않고 일상처럼 잔잔히 보여준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과 무거웠던 마음의 짐은 훌훌 털어버리고 두 손을 꼭 붙잡은 채 해질역으로 들어가는 부부의 뒷모습이 밀레의 <만종>처럼 평화롭게 다가온다.
각각 이승과 저승의 시간을 흘러가고 있는 생자와 사자 두 주인공이 시·공간을 초월해 펼치는 대화가, 생이라는 영원한 화두를 물어 온다.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우리네 세상살이, 과연 자신에게 허여된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엮어가는 것이 제대로 된 인생일까. <해질역>은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시간의 열차에 동승해 종착역으로 향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두 사람의 대화가 거지반 마쳐질 무렵 잠깐 동안의 어둠이 찾아온다. 이 아주 짧은 시간이 마치 허물을 벗듯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가는 과정일 터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해질역’을 지나는 것처럼 그저 일상의 한 부분임을 은유하고 있다.
<해질역>을 통해 연출자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거창할 것도, 유별날 일도 아니니 서로 물고 뜯으며 아옹다옹 살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작가 나름의 생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부부란 전생에 칠천 겁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이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인연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부부라는 이름의 만남인 것을, 한때 패었던 감정의 골로 인해 마지막까지 불편하게 끝맺음을 하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또 불행한 일이겠는가.
연극을 보면서 스스로의 지금을 돌아본다. 이제 나도 시나브로 인생의 해질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편승할 때가 가까워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그 삶의 열차를 타고서 종착역까지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나날들, 이제 남은 시간은 좀 더 성숙하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아 내어야겠다는 다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하곤 한다. 그리해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깃털처럼 가볍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으면 하고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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