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산 자락 후미진 고샅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흐드러지게 피어 눈부신 자태를 뽐내던 아카시아 꽃 이파리들이 그새 반 남아 이울어 패잔병처럼 널브러져 뒹군다. 이승에 목숨 부여받았다 필연적으로 떠나야 하는 이 숱한 존재했음의 흔적들, 세상만사 가운데 변하지 아니하는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을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형상 가진 존재는 그 무엇이든 어느 한 순간도 멈춤이 없이 변화를 계속한다는 것, 단지 이것뿐이리라.
변화하지 않은 채 항시 그대로라면 얼마나 추하고 또 무서울 일인가. 조선시대 사람들이 오늘 이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거리를 활보한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생각만 해도 오싹 소름이 돋을 것만 같다. 사라짐이 있고서야 보다 싱그러운 다시 생겨남을 기약할 수 있는 법이다. 피어 있는 꽃이 그리 아름답게 여겨질 수 있음은 어쩌면 이내 이울고 마는 아쉬움, 그 의미 때문이 아닐까.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도 매한가지인가 한다. 늘상 만나만 있다면 이는 유폐된 공간처럼 숨이 콱 막힐 일이다. 헤어짐이 있기에 우리는 만남을 아낀다. 이렇게 간단없이 달라지고 옮아가는 변전무상이야말로 절대자의 섭리이며 대우주의 이법理法인 것을…….
나는 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에 불가항력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문득문득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는 흠칫흠칫 놀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는 육체적인 겉모습의 바뀜이다. 눈언저리며 이마의 주름살이 깊어지고,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가 하면, 팔다리의 근력이 몰라보게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한 해가 다르게 기억력이 감퇴돼 간다. 무얼 찾고 싶어 장롱 문을 열었는지, 어디로 가려고 길을 나섰는지 이런 일들에 깜빡깜빡하는 자신의 행동에 어이없어 하며 실없는 웃음을 허허거리는 일이 요사이 들어 부쩍 늘어났다.
감성도 세월 따라 몰라보게 바뀌었다. 아니 무뎌져 버렸다고 하는 표현이 오히려 옳겠다. 눈물샘이 유달리 발달해 있었던 탓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걸핏하면 울기를 잘했었다.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면서 별명을 불러대는 또래들의 장난질이거나 혹은 엄마가 다리 밑에서 나를 주워 왔다는 어른들의 짓궂은 놀림을 받을 때면 비쭉비쭉 하다가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기가 일쑤였다. 소슬바람에 하르르 지는 나뭇잎만 보아도 금세 기분이 울적해지고, 찻길에 패대기쳐져 있는 짐승의 주검 앞에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리어 오곤 했었다. 타관살이 시절 고향의 부모님이 못 견디게 그리워 속울음을 삼킨 나날들은 또 얼마였던가. 그만큼 심성이 여렸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이 울음이란 걸 그만 도둑맞고 말았다. 노인의 여러 행동특성 가운데, 웃으면 실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문상問喪 같은 일로 정작 눈물을 흘려야 할 경우에는 도리어 눈물이 나오지 않아 헛울음으로 시늉만 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고 한 이익李瀷 선생의 『성호사설』한 구절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내 비록 지금 노년의 나이에는 아직 그 언저리에도 닿지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곤욕을 치를 때가 적지 않다. 지난 세월 동안 그만큼 마음이 빈곤해져서 그리 된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의 변화가 나를 더욱 아뜩하게 만든다. 한창 혈기 왕성하던 시절엔 정의며 양심이며 순수, 이런 것들보다 소중한 가치는 다시없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들을 위해선 목숨까지 걸어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
이제 그 같은 기백은 더 이상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한두 살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혼탁한 세태에 차츰 무기력하게 길들여져 가고 있는 나를 만나곤 한다. 한편으로는 어떠한 비웃음이나 질시 앞에서도 서리같이 당당한 삶이어야 한다고 내내 고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느슨한 쪽으로 눈감아 주고 싶은 심리가 내 안에 은근히 싹을 내밀고 있다.
이러한 삶의 가치에의 태도 변화가 정녕 옳은지 그른지 도무지 판가름이 서지 않는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불의不義를 보고도 모른 척 적당히 넘어가야 할지, 설사 부러는 질지언정 굽히지는 말아야 할지 언제나 망설여진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고 사람이 지극히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고 한 성현의 가르침이 이럴 땐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타인의 대수롭잖은 말 한마디에 일쑤 촉각을 곤두세우고 옆 사람의 가벼운 눈짓 한 번에도 잠 못 이루며 심하게 가슴앓이를 하는 나약하기만 한 심성, 이 때문에 담벼락에다 대고 머리라도 짓찧고 싶도록 자신이 미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 살 일인가. 이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화두話頭를 놓고 고뇌하는 내게 어느 수필가의 글 한 구절이 적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깜깜한 동굴 속으로 비쳐드는 한 줄기 구원의 불빛처럼. 알량한 자존심이며 명예 따위를 지키려고 노모와 함께 깊은 산속에서 끝내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삶보다는, 비굴하다면 비굴하달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노모를 생각하며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관중의 선택이 보다 인간적이지 않느냐고.
지나친 공손恭遜은 예가 아니라고 했다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공손함이며 어디서부터가 비굴함인가. 어디까지가 강직함이며 어디서부터가 외고집인가. 말로야 손바닥 뒤집듯 간단할 수 있겠지만, 내 무딘 현실 감각으로는 도무지 그 경계를 종잡을 수가 없다. 이래저래 사람살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주제는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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