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화면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서해 교전의 불상사를 되새기고 그로 인해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다.
아스라이 펼쳐진 수면이 어느 호수처럼 평온한 정경으로 다가오는 연평도 앞바다, 저기가 십여 년 전 이맘때 쯤 남북 간에 치열한 함상 충돌이 벌어져 아수라장이 되었던 곳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그새 어언 강산이 바뀔 만한 세월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그 세월 한번 참 무심히 흐르는구나 싶다.
꽃다운 청춘들, 침략의 무리들로부터 자유 대한을 지켜 내려다 몇몇은 채 피어도 보지 못하고 스러져 갔고, 몇몇은 육신에 총탄 파편이 박힌 채 오늘도 고통의 나날을 신음하고 있다. 대체 무슨 철천지원수가 졌다고 그래, 우리는 동족끼리 이렇게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으르렁거려야만 하는가.
이 피 어린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반세기 전의 그 참혹했던 겨우살이를 떠올린다. 빛바랜 한 장면의 흑백필름으로 남아 있는, 아비지옥 같은 비극에 부르르 몸서리가 쳐진다. 부모와 함께 나선 피란길에서, 잡은 손을 놓치고 울부짖는 어린 소녀의 영상이 망막에 흐려져 온다.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에서 천애의 고아가 돼 지친 삶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동란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깊디깊은 산간벽지의 절집마저 포화의 소용돌이를 비켜갈 수 없었던 것일까. 동화사 염불암念佛庵 큰법당 뒤편의 바위벽에 새겨진 석불 조각상에는 그때의 총탄 자국이 엊그제처럼 선명하다. 한국동란은 이렇게 이 산하의 등성이며 골짜기 골짜기에다, 이 민족의 가슴 가슴에다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내어 놓았다. 그로부터 몇 차례나 강산이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렀건만,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 그날의 참상을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
내 고향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산다. 가슴 언저리에 박힌 총탄 파편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부지해 가는 상이용사다. 그는 노래 가사에서처럼,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으며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전장戰場 속을 누비는 악몽에 아직도 가위눌리곤 한다고 했다. 눈비라도 내릴 것처럼 일기가 잔뜩 끄무레한 날이면, 평소 때보다 통증이 더욱 심해져서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라고 하니 그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극심했으랴. 전쟁은 하마 오래 전에 끝이 났건만, 그에게는 이 동족상잔의 비극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으레, 열두어 살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전해들은 할머니의 한 맺힌 사연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찌르르 가슴이 아리어 온다.
연합군의 승리가 임박한 가운데 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아 가던 무렵이었다. 그런 어느 겨울밤이었다고 한다. 하얗게 눈이 덮인 안마당에 환하게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곤히 잠에 취해 있던 당신의 큰아들을 다급한 목소리로 흔들어 깨우셨다.
“지금 네 형과 함께 잠시 몸을 피해 있거라.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구나.”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멀어져 가는 노루처럼, 아들은 부스스한 얼굴로 영문도 모른 채 그 밤에 농민동맹청년위원장을 따라 정든 고향 마을을 떠났다.
할머니는 농민동맹청년위원장을 지낸 이가 바로 당신의 맏조카였던 탓에, 그와 연계되었을지 모른다는 마을사람들의 비난을 저어해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당신의 큰아들을 그 편에 딸려 보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길로 모자는 영영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가만 놔뒀으면 그만이었을 일을 공연히 사서 저지른 꼴이니 그 회한이 어떠했으랴.
그 때부터 할머니의 후반생은 제대로 내 날이다시피 산 세월이 아니었다. 그 일로 해서, 당신은 가슴에다 스스로 자책의 총탄 파편 하나 박아둔 채 평생을 회한 속에 몸부림치다 가셨다. 하얗게 달 밝은 밤 펑펑 눈이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돌이킬 수 없는 자책감에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쾅쾅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곤 하셨으니 그 아픔이 오죽하였을까.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회한이 사무쳐 와, 차가운 눈밭에다 퍽 엎어져서는 꺼이꺼이 속울음을 삼키셨다. 할머니는 그것이 당신께서 저지른, 아들에 대한 잘못을 속죄 받는 길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진 통한은 응어리로 굳어져 심화心火가 되었고, 결국 풀어낼 길 없는 울증으로 인해 정명을 다하지 못하고서 한 많은 생을 접으셨다. 끝내 아들의 생사 여부조차 알지 못한 채……. 전쟁은 그렇게 우리 집안에 비극의 씨앗을 뿌려 놓고 말았다.
아니, 이런 비극이 어찌 우리 할머니뿐이겠는가.
모르긴 해도, 이 땅에 몸을 의지하고서 생을 영위해 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의 파편이 내리누르는 이 통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부모, 형제, 처자, 친지 가운데, 어떤 식으로 얽히고설키든 다들 한두 가지씩 그런 아픔들을 가슴 한 켠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는지…….
이제 와서 새삼 탓한들 무엇 하랴. 할머니의 잘못도, 큰아버지의 잘못도, 마을 사람들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이 민족의 운명적 비극이며 우리 역사의 돌이키지 못할 아픔일지니.
세상에 전쟁만큼 비참한 일이 또 무엇이 있을 것인가. 인간의 행실 가운데 가장 처절하고 가장 야만적인 짓이 전쟁이 아닐까. 그것도 피를 나눈 동족끼리 벌인 다툼이기에 더욱 애통하고 가슴이 쓰리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이렇게 풀려 나가는 가곡 ‘비목’의 애조 띤 선율을 듣고 있노라면, 그 비감 어린 노랫말에 실려 어느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서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외쳐 부르다 스러져 간 무명용사들의 얼굴이 영상에 맺힌다. 그러면서 이내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지금 우리는 내남없이 그분들의 값진 희생에 빚지고 산다. 좋은 집, 예쁜 옷, 맛있는 음식, 안락한 차……, 이런 것들이 가신님들의 목숨과 바꾼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그 날의 아픔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는 삶이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모두가 가슴에다 비장한 총탄 파편 하나씩을 새겨 두고 살아가야 하겠다. 이것이 님들의 거룩한 희생에 만분지일이나마 갚음하는 길이 되리라.
상념에 젖어 흘러간 역사의 골짜기를 더듬고 있노라니, 착잡해진 마음에 텔레비전 화면이 안개 속처럼 뿌옇게 흐려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