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이다. 수성못 둑을 에둘러 난 산책길을 거닐고 있다. 못 동쪽 편 언저리에 자리한 둥지섬 주위로 오리들만 연신 자맥질을 해대며 물놀이에 여념이 없을 뿐 오가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앙상한 겨울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는 매운 바람살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삼월의 초입, 계절은 이미 봄철로 접어들었건만 봄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렇게 스산한 날이면 흘러간 시절의 삽화 하나가 망막의 스크린에 펼쳐진다.
산책길을 면한 신작로 쪽에 세워져 있는 영업용 택시 한 대가 시야에 잡혔다. 유원지와 택시의 조합이 어쩐지 낯설어 보여 자꾸 그리로 눈길이 갔다. 중년 나이의 여인이 두어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에게 오줌을 누이고 있었다. 택시와 여인과 아이, 범상치 않은 광경이 빨아들일 듯 마음을 붙든다.
조용히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 안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오종종한 여자아이 셋이서 뜻 모를 이야기를 재잘대고 있었다. 둘은 고학년, 하나는 갓 학교에 들어간 병아리 같았다.
여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 보았다.
“아이들이 참 귀엽게 생겼네요.”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다고 경계하는 눈빛은 아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버릴 것 같은 눈자위의 그렁그렁한 물기가 여인의 현재 심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건네는 인사에 대답 대신, 몇 번을 주저주저하다가 넋두리 반 푸념 반으로 고단했던 지난 삶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여인의 남편은 막내를 얻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인 모를 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오종종하게 딸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길이 막막해 한동안 눈물로 나날을 지새웠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은 마냥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처녀 시절 한때 운전대를 잡은 경험이 있었던 여인은 다시 일을 나서기로 했다. 그러려니 어린 아이들, 특히 갓 젖을 뗀 막내가 문제였다. 어디 마땅히 맡길 만한 데도 없을 뿐더러, 설사 맡긴다고 해도 경제적 사정이 허락지 않았다. 궁리궁리 끝에 사내아이를 앞좌석에 태운 채 운전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아이가 보육시설에 들어갈 나이가 될 때까지만 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홀보듬엄마가 아이를, 그것도 한둘도 아니고 넷이나 키운다는 것은 여간 힘에 부치는 상황이 아니었다. 참으로 딱해 보이는 사연에 짠한 연민의 마음이 일었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불현듯 지난날 우리 가족이 아내의 직장인 보건진료소에 딸린 관사에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의료 취약 지역인 궁벽한 시골에 들어선 대민지원시설이다. 스무 평이 채 못 되는 크기에 진료실과 처치실을 제하고 나면 실제 생활공간은 형편없이 좁았다. 달랑 콧구멍만 한 방 하나에다 부엌이며 화장실, 붙박이장……,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보니 더욱 솔아져서 지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겨우 무릎을 허용할 정도의 그 열악한 환경에서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아내는 몹시 지치고 힘들어했었다.
생활의 불편은 그나마 나중 일이었다. 아이를 가졌을 때 치른 아내의 입덧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혹독했었다. 밥은커녕 우유며 요구르트 같은 음료마저, 마셨다 하면 바로 토해버렸다. 심지어 보리차만 들어가도 즉각 거부반응을 일으켰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혹심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그림이다. 워낙 못 먹어내다 보니 몰골이 영판 빠짝 마른 명태 같았다. 다리가 꽈배기처럼 뒤틀리고 종아리에는 수시로 경련이 일어났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도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이 임신 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기운을 잃고서 탈진 상태로 빠져들었었다. 한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든다는 절대자의 깊고 큰 뜻이 아니고서야 그만큼 먹어내지 못한다면 그 누구든 벌써 이승의 사람이 아닐 것이리라.
그 때의 입덧 후유증으로 인해 아내는 지금도 몸이 온전치가 못하다. 조금만 서 있어도 금세 허리에 통증이 오고, 약간만 걸어도 이내 다리에 쥐가 나 괴로움을 호소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 서른 해 전의 일이 활동사진처럼 되살아났다. 
이제 와서 내가 산책길에서 만난 이야기 속 여인의 심경을 얼마만큼이나 헤아릴 수 있을까. 지나고 나니 당시의 아득하고 울울했었던 사정이 꼭 남의 일 같이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네 삶이란 직접 겪는 사람의 몫이지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몫은 아니라고 하였는가 보다.
못에는 어느새 산 그림자가 반쯤 음영을 드리우고, 간간이 일던 잔물결도 잦아들었다. 줄곧 자맥질하며 물놀이를 가르치던 어미 오리는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가올 밤, 여인과 오리 가족의 안식을 마음속으로 빌어주며 나도 보금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수면에 잠긴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겨운 눈을 깜박거리며 졸음을 쏟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