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명절 설도 지났고 정월 대보름도 어느새 지나가버렸다. 멀리 있는 아들딸들 만나고 일가친척들과 설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어느 설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금년 설에는 여느 설과는 웬일인지 조금 달랐다. 아마도 나이 탓이 아닌가 한다.
수천 년 이어 온 농경민족에서의 정월 대보름의 의미는 어느 명절보다 남다르다. 한해 농사의 풍년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며 보름날 아침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밝음에 맞춰 먹는 밥은 무시래기, 취나물 등 묵은 나물과 먹는 오곡밥이요, 술 못 먹는 아이들도 귀밝이술이라며 먹는 시늉을 해야 하고, 부스럼 나지 않게 한다는 건과류를 깨어 먹고, 한여름 초학(말라리아)을 예방한다며 복조리로 이웃집에서 얻어 온 찰밥을 방아가래에 걸터앉아 먹었다.
복을 받는다는 복조리는 가정마다 사서 부엌이나 벽에 1년 내내 걸어두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평소 조반석죽,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는 한두 집이 있었다.
대보름 아침이면 그 집은 아이들을 내세워 복조리를 각 가정에 팔아 그렇게라도 해서 생계에 보태기도 했었다.
복조리 뭉텅이를 매고 삽짝 밖에 서 있기만 하면 사 주는 것이 당시의 순후한 이웃 인심이고 미풍양속이며 세시풍속이었다.
그야말로 오늘에서 말하는 불우이웃돕기의 원조였다.
그걸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훨씬 후의 일이지만 그런 상부상조의 미덕은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라 아주 장삿속으로 새벽 담 넘어 던져 놓곤 날이 밝으면 조리 값 받아 가는 일도 한때 있었다.
양속을 빙자한 폐해이기도 했었다. 내가 살았던 서울에서도 80년대까지  그런 습속은 남아 있었다.
낮 동안 동네 앞 정자걸에는 연분홍 치맛자락 날리는 그네뛰기가 있고 공터엔 널뛰기와 윷놀이로 대명절의 풍정을 한껏 돋운다.
그런가 하면 청장년들은 걸궁에 나선다. 걸궁은 원래 걸립패(乞粒牌·풍악으로 동네 공공 목적을 위한 모금 단체)에서 나온 말이지만 걸궁으로 통용됐으며 지금으로 말하면 농악대이다.
동네 골목골목을 휘돌다가 가가호호 방문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서기가 충만하라고 마당, 안방, 뒤란 등 곳곳을 돌며 소원 빌어준다.
입담 좋은 한 걸궁꾼의 앞소리(추임새)가 있었는데 두셋 밖에 생각나는 게 없다. 삽짝을 들어서며 ‘주인주인 문여소 나그네손님 들어간다’였고 부엌을 들여다보곤 ‘…조왕신(竈王神)…’ 했으며 안방엔가 어디에선 ‘…군자동아 옥자동아…’ 했다. 또 ‘성주대신(집을 지키는 신령)아 지신아…’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른바 지신밟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온 동네가 걸궁 잔치였으며 대보름달이 뜰 때쯤이면 뒷산 달집 태우는 달불산으로 풍악 행렬이 이어지고 달이 뜨는 것으로 달맞이 행사는 클라이맥스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명절의 민속 세시풍속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지방마다 그 고유한 민속놀이가 있고 연 1회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전국 단위로 지금도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니 더욱 계승 발전하고 있는데 웬 걱정일까?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대보름 준비 하느라 부산히 움직이는 제 할머니를 본 열 살짜리 손녀가 ‘나 콩밥 싫은데 할머니, 나 내일 아침 잡곡밥 안 먹으면 안 될까요?’ 하는 것이었다. 잡곡밥, 부럼 깨기 등 유래를 설명하고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렵던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던 때는 호·불호를 찾을 겨를이 없었으며 별 문제도 되지 않았지만 먹을 것이 흔전만전인 오늘에서, 특히나 아이들은 식성 따라 선택하다보니 이러다간 언젠가는 세시풍속도 잊히거나 단절되지 않을까 하는 참 헛된 걱정도 잠시 해보았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걸어 온 역사이며 혼이 스며든 세시풍속인데 쉽게 단절될 수야 없겠지만 살 같이 빠르게 변화해 가는 오늘의 세태를 돌아보면 굳이 기우만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황당무계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AI(인공지능)가 어떻고 ‘4차 산업혁명시대…’어쩌고 하는 오늘이지만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열 살짜리 손녀가 잡곡밥 싫다는 것과 1년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었던 내 어릴 적이 극명하게 대비가 돼 언뜻 생각나는 것을 적어본 것이다.
지구촌의 어느 한 민족사(우리나라)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인류의 문명사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