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1박2일 지리산 쪽으로 친구들과 여행가는 길이다. 차창에 비친 지리산은 앙상한 나목만이 남아 다가올 봄 준비에 새움을 트기위한 완전무장이 돼있는 상태다. 겨울인데도 날씨가 포근해서 좋다. 목적지는 전남 구례에 있는 사성암을 향해 내비를 찍었다.
오전 10시 반에 대구를 출발해 88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로 향해 차는 쏜살같이 달린다. 지금은 88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말끔히 단장돼, 대구에서 광주까지 ‘대광고속도로’라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옛날 구 도로는 터널이 몇 군데 안 되고 구불구불 편도1차선 도로라서 운전하기도 힘이 들고, 비 오는 날이나 야간에는 교통사고가 많이 났다고 한다. 거창. 함양을 지나 지리산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남원IC를 거쳐 구례. 순천방면의 국도를 달려 2시간 50분만, 사성암에 도착했다.
사성암은 통일신라, 고려후기까지 고승들의 수도 처로 그 후에 연기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전해지며,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대사, 의상대사 4명이 수도를 했다고 해서 ‘사성암(四聖巖)’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올라가는 산길이 너무 험해서 구불구불 절벽 길을 오르는데 다소 겁이 났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했고 떨어지면 저승사자가 마중 나올 것 만 같았다. 바위 위쪽을 뚫고 나온듯한 약사전과 사성암은 절벽 위 바위사이에 박혀놓은 듯 했다. 바위위에 제비집같이 살짝 얹어 놓은 듯 한 대웅전과 약사암은 절과 자연이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사성암이 위치한 오산은 큰 산은 아니지만 성인들께서 수행 처로 삼아온 터답게 마치 금강산의 일부를 옮겨 놓은 기암절벽에 박혀있는 형상이었다.
오산의 8부 능선에 위치한 사성암엔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원바위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소원을 빌고 있었다.
약사암을 오르는데 는 이른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범인의 짐작으로도 아마 깊은 뜻이 담겨져 있지 않나 생각 된다. 불교에서 108계단을 임의로 만들어 놓은 것은 백 여덟 가지의 번뇌를 거쳐야 극락세계에 다다른다는 뜻이리라!
드디어 대웅전에 올라섰다. 가쁜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잠시 숨을 고루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튀어 나온다. 눈앞에 펼쳐진 섬진강 물줄기가 잔잔하게 흘러가고, 먼 산 중턱에는 물안개 같은 새털구름이 깔려있는데, 가보진 않았지만 극락세계의 도솔산에 오른 기분이다. 겨울인데도 바람한 점 없고 따뜻한 게 마치 어머니 품속 같았다.
지리산의 맑은 물줄기가 섬진강을 이루어 경남 하동까지 이어졌다. 그 옛날 왜군이 한 밤중에 배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침범하면 두꺼비들이 일제히 울어대며, 왜군을 도망가게 했다고 해 섬진강(蟾津江)이 아니던가.
옷매무세를 고치고 법당 안으로 들어서니, 보살님 한 분이 미소를 머금고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법당 안 부처님은 원래는 53불이였는데 지금은 35불만 남았다고 한다.
두 손을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니, 그윽한 눈으로 부처님이 나를 바라보신다. 나는 좀처럼 부처님께 기도를 안 드리는데 오늘따라 자꾸만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아마 내가 염원하는 소원 한 가지는 들어주실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속된 말로 기도발이 받는 모양이다.
우리가 절에 오는 것은 절을 하러 오기에 절이라고 이름 짓지 않았을까? 절에 와서 부처님께 절을 하면 모든 일이 ‘절로절로’ 잘된다고 절이라 불렀을 것이리라!
대웅전을 뒤로하고 도선국사가 참선했다는 도선굴과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새겼다는 마애여래입상도 볼 겸 약사암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꾸불꾸불 하늘에 닿을 듯 한 곳에 위치한 약사암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시원스런 풍광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보면서 사바세계를 떠난 듯 한없이 마음이 평온하다. 올라올 때는 무릎이 아파 힘들었지만, 정말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그런지 무릎이 다 나은 것 같았다.
약사암 뒤쪽에는 소원을 비는 띰바위가 있다. 뗏목을 팔러 하동으로 내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을 떠난 아내와, 또한 아내를 잃은 설움에 끝내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든 바위가 곧 띰바위다.
무슨 소원이 그리 많을까? 가족 건강을 비는 소박한 염원, 청춘 남녀가 사랑이 꼭 이루어지길 바램과, 사업번창을 담은 내용 등…….
여기를 찾는 모든 중생들이 띰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해서 바위 앞 통에 노란 하트모양의 종이에 소원을 적어 부처님 뒤 쪽으로 기다랗게 줄이 매여 있었다. 그리고 바위 앞에는 미소부처님 상이 있고 복전함이 놓여 있었다.
“이곳 미소부처님을 친견하는 분은 소원이 이루어집니다.”라고.
나도 종이에다 소원을 적어 불전함에 돈을 넣고 미소부처님께 소원을 빌었다. 소원바위에 소원을 빌어서 그런지 하산하며 내려오는 발길은 한결 가벼웠고, 오는 길에 남원 광한루를 거쳐, 대광고속도로를 쏜살같이 달려 단박에 대구에 도착했다.
어느 수필가는 “이 세상에서 추억이 많은 사람이 제일 부자이며, 추억이 없는 사람은 잔고 없는 통장과 같다”라고 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추억을 쌓게 한 보람 있는 추억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