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고향 근처의 산골에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뒤로 생활 방식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른 새벽, 멀리 반룡사盤龍寺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도량석 소리가 침묵에 잠긴 세상을 깨우면 습관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졸린 눈을 비비며 2층 서재로 올라가 책상 앞에 앉는다. 컴퓨터를 열어 밤새 쌓인 전자우편함을 확인하고는 하루의 일과를 점검한다.
이윽고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면 언제나처럼 앞마당으로 나가 절 쪽을 향해 삼배를 올린다.
그런 다음, 갖가지 꽃나무들에게 간밤의 안부를 묻고 이름 모를 산새며 벌 나비들하고 아침인사를 나눈다.
이 생명체들과의 교감은 번다한 도회지 생활에서는 누리기 힘든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다 준다.
대처에서 살 때는 그다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역사의 흔적을 음미하는 재미에도 푹 빠져 지낸다.
꼭 운수납자雲水衲子가 아니어도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내맡겨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옛 자취를 더듬는 것은 내게 적지 않은 삶의 의미를 선사한다.
천 년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가 발길 닿는 곳마다 유적 아닌 곳이 없다지만, 오백여 년 대가야의 도읍지였던 내 고장 고령 역시 그에 못지않게 가는 곳마다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그 역사의 자취들을 돌아보며 우리 고장에 살다 간 조선祖先들의 삶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요즘 들어서 이전까진 몰랐던 생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게 하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손가락으로 꼽아 가며 하나하나 정리해 보니, 까마득한 옛적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몇 번을 굽혔다 폈다 해야 할 만큼 가짓수가 넘친다.
우리나라 3대 바위그림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장기리 암각화며 청동기 시대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로 만든 성혈性穴이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주산 등성이의 고분들이며 가야 왕들이 사용하던, 이 땅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우물인 왕정王井, 고운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서려 있는 벽송정碧松亭, 가야산 해인사보다도 먼저 창건됐다는 작지만 큰 절집인 반룡사盤龍寺, 고려 때 강화도에 보관되어 오던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이운한 개경포開經浦, 여말 이성계의 반란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이미숭李美崇 장군의 충절이 서려 있는 미숭산, 가야금을 만든 우륵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우륵박물관과 기념탑, 성리학의 태두로 추앙 받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사당이 있는 개실마을, 임진왜란 때 최초의 의병장인 곽재우郭再祐를 휘하에 거느리고 혁혁한 공을 세운 뒤 순절한 김면金沔 장군을 모셔 놓은 도암서원道巖書院, 조선 후기 정의의 판관으로 회자되고 있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일화가 전하는 만남재萬南齋, 불법을 수호하고 불보살의 공덕을 찬양하며 경전을 널리 유포해 인간 세상에 정법을 펼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세운 지산리 당간지주幢竿支柱, 고령의 유일무이한 마애불인 개포 석조관음보살좌상石造觀音菩薩坐像, 조선 말기 상인들의 상호부조를 위해 결성된 상무사商務社를 기리는 상무사기념관, 군 단위로는 단 하나밖에 없는 수목원인 대가야수목원, 자그마치 65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평지마을의 느티나무……,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까마아득한 과거세에서부터 근세, 현세를 아우르는 이 수많은 문화유산들은 작지만 큰 고을인 고령이 자랑할 만한 소중한 전통이다.
이 문화유산들이 있어, 대가야국은 비록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 쉰다.
요즘 들어 나는, 조선들이 남기고 간 우리 고장의 문화적 소산들에 담긴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내가 대가야국의 후예임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