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수원제일평생학교장 박영도(57) 씨는 야학을 33년간 운영해오고 있다.

1980년대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 야학교사 모집 광고를 보고 교사가 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고등공민학교! 참으로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는 학교 이름이다. 내가 1955년도에 수륜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효목이 야간인데 비해 나는 주간이라는 것뿐이다. 60여 년이 지났으니 추억이 되기에 충분하다. 내겐 추억을 넘어 희망에 부푼 낭만의 계절이었다.

참 어려운 시절, 그때까지도 초근목피가 시대적 수사(修辭)였다. 초교를 졸업하고 2년을 놀다가 청운의 꿈(?)을 안고 입학했었으니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좀 뒤에는 본군 덕곡에도 고등공민학교가 설립돼 있었다.

박영도 씨가 운영을 시작했던 1980년대와 내가 수륜고공교에 입학했던 때와는 30여 년의 시공적 간극이 있으니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그때가 더 열악하고 더 어려웠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풍요로운 오늘에 비해 당시는 정말 상상도 되지 않을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초교 졸업하고 정규 중학교를 갈 수 없는 아이들은 그나마 뜻을 품고 입학을 했던 것이다. 사실 거기도 입학할 수 없는 계층을 생각하면 고공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4·19가 왔다. 소명 의식과 정의감의 표상인 대학생들이 분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 흘려 다시 세운 나라인데 소명 의식의 발로였는지 나라사랑의 길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지인 집에 갔더니 서울대학교 남녀 사범대학생 넷이 와 있었다. 피폐한 농촌의 계몽과 봉사를 위해 전국을 순회한다는 것이었다. 극악했던 자유당 폭정에 시달렸던 참 어려운 때에 위대한 민권의 승리가 가져온 새 나라에 할 일이 오죽 많았을까.

취업에 휘둘리는 오늘날의 대학생과는 확연히 달랐다. 4·19의 한 주역이었던 대학가가 뭔가 국가사회를 위해 일할 열정으로 가득했었다. 사회 리더로서의 위치도 확고했었고, 대학생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지도층이기에 충분한 때였다. 그래서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 의식도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들은 1박2일 동안 부녀자들에겐 건강과 위생 교육을, 청소년들에겐 새 시대를 맞아 공부해야 하고 개인의 진로와 사회와 나라 위하는 길이 뭣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돌아갔고 지인은 내게 말했다. 대학생들이 저러니 우리도 나라 위해 뭘 하자고 했고, 내가 야학을 열자고 제안했다.

제안은 그 자리서 바로 확정하고 다음 날 동장을 만나는 것으로 첫발을 뗐다. 동장은 이 희망찬 계획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한참 전에 야학을 열었다가 남녀 풍기의 문제로 소동을 불렀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내가 반론을 제기·설파해 허락을 받았다. 철옹성 자유당 정권도 무너뜨리고 위대한 민권 승리의 시대인데 그리고 또 시대가 바뀌었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다.

동사(洞舍·지금의 마을회관)를 야학당으로 쓰고 중학교 과정 ‘통신강의록’이 교재였다. 의무교육은 실시됐지만 초등학교에 한했으므로 초교 졸업생이 주된 대상이었다. 부녀자(당시 말로 남의 집 식모)도 있었고 부설 문맹반도 있었다. 오늘에 비유해 통신대학교라 하면 어떨까?

교사진은 동네 초등학교 교사 두 분이 있어서 하루씩 맡기고 지인과 나도 윤번으로 맡았다. 고등고시 준비생, 무허 의사(그땐 돌파리도 버젓이 의료행위가 일반화됐다)도 좋은 취지에 동의하여 특강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40여 명의 야학생들은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때로는 호연지기를 길러준다는 의미에서 봄철 야외 교육으로 천렵(川獵)도 하고, 국민 계몽을 내세워 내가 쓴 대본으로 연극제도 열고, 면내 체육 행사에도 참여했다.

그렇게라도 배웠던 당시 야학생들은 그래도 딱히 야학 덕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학교의 사무직, 중견기업 사원, 개인사업 등으로 건실한 사회인이 되었고, 농토를 끝내 지켰던 일부는 영농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나마도 자그만 보람이 아닌가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만 250여 야학당이 있었고 전국엔 3천여 개가 있었다 한다. 이보다 앞선 60년대에 야학당을 운영했다니 나도 선경지명(?)이 있었었던 걸까, 아니면 거창하게 소명 의식이라도 있었던 걸까? 오늘에 와서 보니 어찌 됐건 자존감은 있다.

야학에 관한 한 우리나라 농촌 계몽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경기도 안성의 최용신(1909~1935)이 있었다. 우리 근세사를 돌아볼 때 그때가 ‘교육 입국’이거나 교육의 여명기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소설가 심훈(1904~1937)의 작품 상록수가 최용신의 야학이 모델이었는데 어쩌다 두 분이 요절까지 했으니 우리를 더욱 숙연케 한다. 한마디 더 하자면 나도 어설프게나마 소설을 쓰겠다고 공부하던 중에 야학을 열었으니 우연의 일치라고만 하기엔 뭔가 허전함을 숨길 수가 없다. 아마도 잡문 정도로만 쓰고 있는 내 초라한 모습이 비춰졌기 때문이리라.

내 감히 최용신의 흉내도 낼 수 없었지만 열정 하나만은 있었다고 자부해 본다. 내 그렇게 젊은 날 그런 한때를 보내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