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니 온 천지가 하얗다.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흰 도화지에 그린 한 폭의 설경화를 보는 것 같다.
아파트 정원의 소나무에도 가이스까 향나무 위에도 소복소복 쌓였다. 하얀 눈꽃에 파묻혀 뾰족이 드러난 소나무 잎은 더욱 푸르고도 싱싱하다.
아침 뉴스 특보에 영동과 동해안 지방에 쏟아진 눈 폭탄이 백 년 만에 처음이란다.
올해만큼 추웠던 해가 또 있었을까. 삼십 년 만에 처음이며 대나무가 잎이 다 말라 죽었단다. 입춘이 지난 지 열흘이 넘었지만 동장군은 좀처럼 물러 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닷새 후면 우수(雨水)다. 우수가 지나면 대동 강물도 풀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다. 설을 거꾸로 쇤 것일까. 가뜩이나 나라 경제도 좋지 않고 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지만 나라님도 못 막고 있지 않는가.
한해 농사로 자식들의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에 구제역 파동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폭삭 무너져 앉아 곱사등을 떡메로 내려치는 놀부 심보 같다. 날씨가 추워 난방비는 곱절로 들건만 언제쯤 동장군은 물러날 것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철부지 어린 시절, 눈이 오면 무조건 좋아 온 천지를 달음박질치던 때가 있었다.
검둥이와 눈밭을 뛰어 놀던 시절이 엊그제만 같은데 인생의 3막 2장에 접어든 지금, 동심의 세계는 아득한 추억으로 가물가물 잊혀져만 간다.
눈이 오면 눈사람도 만들고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던 옛 시절이 그립다.
초등학생 때 눈 덮인 학교 뒷산에서 선생님과 토끼몰이 하던 일이며, 꿩은 세 번만 날면 더 날지 못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이 산 저 산을 쫓아다녔던 시절이 우습다.
뜬금없이 어릴 적에 즐겨 부르던 눈 노래가 생각난다.
눈 눈 눈 받아먹자 입으로/ 
아 아 아 코로 자꾸 떨어진다/
호 호 호 이게 코지 입이냐?
      - <윤 석 중> -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그 어느 날이었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을 때였다.
학부모의 노역으로 흙벽돌을 찍어 지은 교실에 창호지를 발라 창문을 내고, 진흙 바닥에 거적때기를 깔고 책상도 없는 교실에서 가갸거겨를 배웠다.
그것도 교실이 부족하여 고학년은 오후반부터 1교시가 시작되었다. 2Km가 넘는 학교까지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전 내 저수지에서 얼음지치기, 논둑에 불 놓기가 공부였다.
솜 놓아 만든 무명 바지저고리에 명주 목도리하고 나일론 양말에 검정 고무신이 교복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 발가락이 얼어 동상을 입은 아이들도 많았다.
그 어느 날이었던가.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잠꼬대같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보자기를 등에 메고 학교 가는 길이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저수지가 온통 눈밭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동네 친구가 동무들과 얼음지치기를 하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는가.
모두가 똑같은 코스를 지나쳐도 괜찮았건만 그 친구는 덩치가 크고 몸무게가 더 나가서 그리 된 모양이었다. 한복 솜바지 저고리가 물을 먹으니 무게가 더 나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고, 우리들은 책보자기를 여러 개 연결하여 겨우 구조해 낼 수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휴대폰을 때려 연락을 했었겠지만 당시는 선생님과 부모님 꾸중이 두려워 오전 내내 논둑에 불을 질러 친구의 옷을 말리기에 급급했다.
물먹은 솜바지를 마주 잡고 비틀어도 보고, 불에 쬐어 보아도 쉽사리 마르지 않았다.
오후 반 시작종은 울리고 채 마르지도 않은 옷을 입고 학교로 갔다. 난로도 없는 진흙 바닥의 교실은 냉기가 차올라 시베리아 벌판이었다.
‘병만’이라는 덩치 큰 그 주인공은 제일 뒷자리에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업시간 중이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다.
그 친구는 얼마나 추웠으면 온몸이 마치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을까.
옆에 앉은 친구가 “병만이 쟤는 왜 떨고 있니?” 하고 물었을 때 “응 쟤는 신이 들렸는가 봐?”라고 얼버무렸다.
당시는 선생님이 알면 집단적으로 벌을 받을까 봐 말을 아꼈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의 별명이 ‘신들린 아이’로 통했다.
지금은 시골에서 농장을 크게 하여 부잣집 사장이 되었지만, 신들린 아이로 어린 시절을 보낸 거짓말 같은 추억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당시에 시근이 든 아이가 하나만 있었더라도 중간학교(?)를 해 옷을 말린 다음 집으로 돌아왔을 텐데…….
눈 덮인 하얀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강산이 여러 번 바뀐 지금에도 아련한 추억이 아슴아슴해 오고 더욱 더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그 친구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 내려앉은 비닐하우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신들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고 살을 에는 듯 추운 날이면, 뜬금없이 신들린 옛 친구가 자꾸만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