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하게 미명에서 깨어나고 있는 시간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동대구역 구내를 들어선다. 세시풍속을 맞이하듯 이따금씩 갖게 되는 상경 길이다.
조금 있으면, 서울행 열차가 진군나팔처럼 기적 소리를 날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올 것이다.
먼 타지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다 근교 소읍으로 출근길에 나선 직장인들의 행렬까지 더해져 대합실은 벌써부터 부산스럽다. 채 가시지 않은 지난밤의 피로와 옷자락에 묻혀 온 새벽 공기의 활기가 뒤섞이며 한바탕 술렁인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 줄곧 두리번두리번 이쪽저쪽을 살핀다.
그러다가 힐끔 뒤를 돌아다본다. 순간 둘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단박에 서로를 알아봤다. 그는 긴한 회사 일로 지방 출장을 내려올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와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실로 이십여 년 만의 해후가 되는 셈이다. 전혀 어색해 할 이유가 없는 만남이었지만 어쩐지 어색한 조우였다.
우리는 두 손을 부여잡고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고 있어도, 대화는 망가진 나사못처럼 겉돌았다. 지난 세월 동안 둘 사이에는 이야깃거리의 공통분모가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서먹함을 못 견뎌 하며, 마주보면서도 애써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허허하게 만들었다. 하기야 허허하기로는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헌칠한 키에다 부리부리한 눈, 오뚝 선 콧대, 도톰한 입술, 빚은 듯 반반한 얼굴 윤곽, 잡티 하나 없이 해맑은 피부……, 한마디로 영화배우 뺨치게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였었다. 어쩌다 햇볕 쨍쨍한 날 색안경이라도 척 끼고 나타나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멋스러운 모습에 눈길을 빼앗기곤 했었다. 얼마나 준수한 생김생김이었으면, 같은 남자가 봐도 한순간에 반하고 남을 정도였으니까.
그랬던 그이였건만, 그새 몰라볼 만큼 몰골이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세월 탓이었다.
세월이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 놓을 줄은 미처 몰랐다. 임금 왕王자로 깊게 골이 진 이마의 주름에다 눈가의 잔주름까지 더해지고, 분을 바른 듯 뽀얗던 피부에는 거무튀튀하게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나마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부위라곤 오뚝한 콧날 정도라고나 할까.
변해도 변해도 어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던 옛 어른들의 말씀이 바람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대구에서는 알부자로 소문이 났던 D학원 이사장의 친동생이었다. 그 덕분에 당시로서는 웬만해선 꿈도 꿀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까지 다녀와,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음악도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외국 물을 먹어서였던가 보다.
세련된 몸가짐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귀공자풍의 고상한 분위기가 배어났다. 이따금 기분이 오르면 평소 자신이 즐겨 부르던 아름다운 가곡이며 오페라 아리아들을 들려주곤 했었다.
가슴을 적시는 깊고 그윽한 바리톤의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그가 주섬주섬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뭔가를 건네 온다. 명함이었다. 금박으로 옷을 입힌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그 명함에는 ‘00실업 대표’라는 직함이 선명했다.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일까, 와락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끝내 물어 보지는 않았다. 달갑잖은 질문으로 혹여 가슴 아픈 추억의 현을 건드려 놓을까 봐 저어해서이다.
그는 사업체를 꾸린 지가 하마나 십 년이 넘어 됐다고 했다. 그 말 속에 어딘지 모를 아쉬움이랄까 회한 같은 것이 묻어났다. 한때 그가 꿈꾸었을 세계적인 음악가로서의 길은 이제 그만 완전히 접고 말았는가 보다.
돈 버는 일과 돈 쓰는 일, 무엇이 그로 해금 삶의 길을 그렇게 N극과 S극으로 바꾸어 놓도록 만들었을까. 음악 하는 것이 돈 안 되는 일임을 알아차리고서 일찌감치 삶의 운전대를 반대 방향으로 틀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바로 나의 거울이었다. 누가 나를 대하고서도 사람이 어이 저리 변한 거지?, 돌아서서 쑥덕거리지 않는다는 장담 할 수 있을까.
스스로는 늘 보는 그 얼굴 그 모습으로 여기고 있을지라도, 정작 시나브로 몰골이 사그라져 왔을 터이니 말이다. 하기야 자꾸만 어깻죽지가 처지고 하루가 다르게 팔다리의 근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기억력마저 눈에 띄게 감퇴돼 간다.
그는 나의 거울이 아니기도 했다. 글을 쓰는 일이 음악 하는 삶처럼 애당초 돈하고는 거리가 먼 것임을 깨치고 난 뒤에도, 수십 년 세월을 우직스레 붓대 하나 거머쥐고 버티어 왔으므로. 그리고 어쭙잖은 다짐 같지만, 앞으로도 이 붓대를 놓아 버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마의 주름은 세월이 새겨 놓은 인생의 인장印章이다. 그 인장에는 한 인간의 기쁨이며 슬픔, 고뇌며 환희의 순간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돼 전한다. 그것은 문자로 쓴 그 어떠한 기록보다도 확실한 그의 삶의 이력이다. 이 이력의 밭고랑에 서서 휘적휘적 넘어온 시간의 언덕을 뒤돌아보노라면, 한편으론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허망해지기도 한다.
제 아무리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즐기며 지내왔어도 막상 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회한 없을 인생이 어디 있으랴.
회한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인 것을……. 다만 섭리 앞에 고개 숙이고서, 내일 훌쩍 이 세상을 떠나갈지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리라. 이것이 세월의 강을 건너는 지혜인가 한다.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그가 저만치 멀어져 간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서 있다. 안개가 서린 듯 눈앞이 흐려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