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텅 빈 집을 종일 오도카니 혼자서 지키게 되는 날이 있다. 아내는 아침 일찍 직장에 출근을 하느라 서둘러 나가고,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제각기 볼일을 위해 늦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썰물처럼 빠져 버린다.
이런 날이면 책상서랍을 친구 삼아 뒤죽박죽으로 몸을 뒤채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질서 없이 포개져 있는 묵은 책자들을 들춰 보며 턱밑까지 다가드는 무료를 달래곤 한다.
거기서 우연히 흘러간 시절의 빛바랜 사진이나 오래된 편지 쪽지 따위를 발견하게 될 때에는 까까머리 적의 옛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아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찾은 듯 흔흔한 기분이 된다.
학창 시절 절친했던 벗에게 보내기 위해 썼던 한 통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어떤 까닭으로 부치지 못하였던가. 잉크가 번져 흐릿해진 그 편지지에는 흘림체로 줄줄 갈겨 쓴 사연이 적혀 있다.
 “경아, 지난 연말 네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말씀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직접 목소릴 확인하지 못해서 섭섭했단다. 그 후론 다시 소식이 없어 궁금하구나.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생긴 거니? 연말연시는 어떻게 보냈고 난 ‘모임이 있으니 나와 달라’는 친구의 전화 연락도 뿌리치고 그냥 동생하고 둘이서 이야기나 하며 지냈다. 웬일인지 도무지 마음에 내키지가 않아서……”
그 모임이란 대체 무엇이었으며 친구는 누구였는지. 그리고 또 무슨 일로 마음이 심란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하나도 기억 속에 없다. 편지 말미에 ‘1980년 1월 14일’이라 기록돼 있는 걸 보니 벌써 삼십 년도 훨씬 더 지난 내용이다.
어떤 때는 레코드를 틀어 놓고 쇼팽의 ‘야상곡’을 음미하거나 사라사테의‘지고이네르 바이젠’에 취해 보기도 한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보랏빛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충만감, 이건 무료한 시간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색다른 정감들이다. 이런 것들은 고단한 일상에 지쳐 나른해지는 내 빈약한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군사정권의 철권통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힘겨루기를 했었던 암울한 시절, 그때는 내남없이 사람살이가 얼마나 힘에 겨웠던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진한 그리움이 돼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땐 어김없이 고향의 정경과 지난 추억들이 떠오르고,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애잔하게 저려 온다.
그리움도 지나치면 병이 되는가 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한두 살씩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깊어지는 고질병이 됐다.
이것이 어찌 나 혼자뿐일까.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게 마련이고, 그곳을 생각할 때만은 숨 가쁜 세상살이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옛 시절에의 그리움으로 두 눈 그득 눈자위가 그렁그렁해짐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조는 듯이 서 있던 동구 밖의 아름드리 정자나무며 둘레둘레 퉁방울눈 굴리던 외양간의 황소며 집 안팎의 온갖 자질구레한 허드렛일로 거칠어진 거북손등의 어머니가 이따금씩 못 견디게 보고파지곤 한다.
힘에 부치는 세상살이에서 훌쩍 떠나 언제든 찾아가서 마음을 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고향 생각을 할 때면 누구 없이 금세 열두 살 동심이 된다. 우리들 일상사에서 얻는 내면의 잡다한 상처들은 그로 해서 적잖이 위로 받는다.
오늘날 삶이 모래알처럼 각박해지다 보니 마음 푸근히 기댈 고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아진 것 같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리저리 떠밀리는 부평초 같은 인생들, 그런 사람은 요행히 만금의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추수 뒤의 황량한 벌판 같은 공허감으로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을 성싶다.
그들의 삶은 이리저리 부유浮游하는 하루살이처럼 불안정해 보인다. 그러기에 고향은 누구에게나 다시없는 정신적인 안식처가 돼 준다.
마음의 고향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만큼 가슴이 따뜻할 것 같다. 성정이 순후하고 웅숭깊을 것 같다. 고향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그리움의 연인이며 삶의 대지인 까닭이다.
이따금 외로움이 깊어지는 날이면, 나는 고향의 정경을 담은 그림을 마음속에다 그려 보곤 한다. 그것은 가슴으로 그리는 수채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