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홀아비 옆구리 시린 바람이 불어온다.  이숍 우화의 바람보다 센 ‘샌디’같은 바람이 인정사정 없이 밀어 붙이고 있다.
창 틈새를 단속 하느라고 양면 접착용지로 온 종일 수고하여  封(봉)하였건만 엄청난 기세로 밀고 들어와선 한껏 운치를 낸 양촛불의 끝날을 더욱  길고 뽀족하게  만들다간 사라져 가지만 매섭기가 여간 아닌 것이다.
걱정스런 마음에 촛불을 끄고, 형광등을,  아니 잠등이라도  켤까도 생각해 보지만 어차피 막내둥이(황국)와의 대화를 할려면 한 자루 촛불의 밝기가 격식에 맞을 듯하여 지긋히 눈을 감아본다.
지금까지는 눈으로만 나누던 대화가 이젠 눈을 감으니 귀속의 달콤한 말로 들을 수 있으니 전등을 켜지 않은 것이 정말  잘한것 같다.
‘잘 잤니?’
‘아니예요. 어제 신문에 난 기사거리 때문에 가위눌림으로 잠을 설치고 나서 줄곳 잠을 잘수 없었어요.’
‘저런! 꼭 자라고 했잖니?  누가 대통령되어도 너의 세월,  가을은 오고 갈거라고 하면서 그렇게 잘자라고 했잖니?’
이것이 통상 말하는 나와 황국화와의 새벽 첫 인사가 된지오래다.
벌써 몇해 전이던가? 
이웃 벗으로 허물없이 지내던 상숙네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면서 그네들과 그네들의 조상님들의 터전인 金海(김해)로 이사 갈 때 황국화 화분을 정리하다가 성한것은 가재도구라도 되는양 챙겨가면서 적선인지 정표인지로 주고간 국화. 
잔뿌리 몇 개 달린 엉성하기만 하던것이 이제 제법 처녀티가 나는 화분이 되어 올 가을엔 나의 침침한 침실이자  서실의 허브화(향기꽃)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나의 독백의 상대가 되어 준것이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녀석도 종족보존의 원칙에 따라, 몇 일 전부터 부푸르 오르는 가슴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피기 시작하여, 나의 사랑이 더욱 짙어졌다. 
이 아이(국화)를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정이 가고 옛추억이 새삼 떠 오르며 마음의 평온을 갖게된다. 
내 나이가 어느듯 一巡甲(일순갑) 되어 다시 시작되는 날을 눈앞에 두고있지만 지금도 잊지 못 하는 어머님의 품속처름 온갖 잠념을 다 잊게하며, 어쩌다가 벌떡 일어난 오밤중 일지라도, 이 녀석(국화)을 어루만져 주면서 놈의 향기를 맡으면 또다시 곱게 잠을 잘 수 있는것이 여간 곱지 않다.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잠이 들면, 꿈속에서 고향친구도 만나고 이웃도 뵙게되며,  내가 열 살박이 樵童(초동)아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척좋다. 빙그레 웃어 볼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아무리 거울을 보며 연습해도 배불뚝이가 감추어 지질 않더니만,  어릴때의 귀엽고 어여쁜 내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언젠가 소풍가서 노래 부르는 중에,  바람에 치맛자락이 치켜 올라 갔다고 울음을 멈추지 않던 상숙이년과  손잡고 빙글빙글 도는 착각에 빠질 때 쯤이면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을 수 밖에 없다.
저 멀리서 선생님은 ‘애들아 위험하다’ 라고 외치시며 달려오고, 우리는 속옷(팬티)도 못 걸치고 줄행랑을 쳐 내 빼곤 하던 마을 앞 강가의 물빛이 검푸른 빛에서 점차 황토빛이 되면서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과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 수차례나 서로서로 오버랩되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단꿈도 이녀석과의 밀담을 주고 받은 후의 잠자리 만이 가능하니,  내가 이녀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 첫 새벽에 이 아이(국화)에게 가만히 볼을 맞대어 보면, 녀석도 나를 꼭 보듬는다.
벌써 콧수염 흉내를 내는,  내조카 열 일곱명중에 가장 끝자락인 상권이 보다 흘씬 더  맛나게  앙징스런 자태로 안겨온다.      
‘오늘은 햇님이 일찍 가셨어요. 추웠어요, 보고 싶었어요. 요사이는 물을 주시지 않아 목 말라 혼 났어요...’등의 끝없는 투정을 듣다 보면 국화의 이야기인지 나의 생활사 인지 뒤범벅이 되어  성능 좋은 오디오 세트의 음향처럼 내 가슴 속속들이 들어와 앉는다.
혼란스런 입씨름 중에도,  엄마가 아가의 끝없는 물음에 答(답)이 궁해지면 입맞춤으로 얼무르듯이, 나도 그만 이 녀석과 입맞춤을 하게 된다.
오늘 새벽엔 녀석의 꽃술 하나를 물어뜯어 버렸다.  녀석은 그래도 울지 않았다.  아니 웃고 있었다. 새 하얀 수액피를 방울방울 흘리면서도 원망없이 나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큰 기지개를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직업군인이되어 내곁을 떠나간 막내 아들 녀석의 사진이 나를 애처로이 처다보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