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다. 바람살로 감지하는 가을, 옷깃을 여민다. 포도(鋪道) 위를 뒹구는 낙엽들이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가을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 진정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연의 메신저 일지도 모른다.  가을 들판에는 잘 여문 땀방울이 벼 이삭이 되어 출렁이고 있다. 보이는 것들이 시나브로 지워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금 읽게 하는 사색의 시간들, 내가 버리지 못한 것들이 나를 묶고 있었음을 깨우치게 하는 명상의 저녁이 깊어가고 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 한쪽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있어 좋았어/ 너무 약해지지 마!
문득 ‘시바타 도요’의 ‘약해지지 마’란 시가 떠오른다.
우리 인생의 봄은 한쪽 편만 들지 않고, 평등하게 오는 것이리라. 너에게도 오고, 나에게도 오고, 우리 모두에게 오는 것, 햇살과 바람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 어떤 날은 하늘이 유난히도 파랗고, 높아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하늘이 잔뜩 울상이 되어 비바람을 뿌려도 어쩔 수 없는 것, 우리 모두에게 이것 또한 평등한 것인데,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 아닌가. 내 마음의 하늘은 내가 만드는 것, 많이 웃으면 파란 하늘로 보이고, 아파하고 얼굴 찡그리면 흐린 하늘로 보이는 것이리라.
알았지? 조금 아프다고 약해지면 안 되는 것을, 웃으면서 브이 자를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아픈 날 보다, 웃는 날이 더 많을 테니, 너무 약해지지 말라고 시인은 가르친다.
길가에 가녀린 코스모스가 애처롭다. ‘소녀의 순정’이란 꽃말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일까. 세 번의 큰 태풍에 휩쓸렸으나 뿌리는 뽑히지 않고 줄기만 누웠다. 그리고 기어이 꽃을 피워냈다. 가녀린 이미지가 아니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가을밤 달빛아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은 생명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가을과 코스모스, 그리고 억새는 불가분의 관계다. 억새꽃이 카리스마가 있는 남정네의 꽃이라면, 코스모스는 가녀린 아낙네의 꽃이라고나 할까. 이 둘은 궁합이 잘 맞는 꽃 같다.
파아란 가을 하늘아래 은빛 억새가 손짓하는 가을 길을 걷노라면, 가녀린 코스모스 아가씨가 쌩긋이 미소 지으며 반긴다.
노오란 은행잎이 살랑살랑 나비되어 인도 위에 떨어진다. 잎을 밟으려다 열매를 밟았다. 역한 인분냄새가 코를 찌른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은행열매도 자기 방어기재를 가지고 태어났나보다. 코를 막고 손사래를 친다.
올해의 가을하늘은 유난히도 파랗다. 폭풍이 지나간 뒤 바다와 같이 잔잔한 가을 하늘엔 솜털보다 보드라운 뭉게구름이 피어 있다. 유유히 떠있는 뭉게구름 같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 가는가보다.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 칠 때면, 한 치 앞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화사한 햇살이 온 누리에 살포시 내려앉을 때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것이리라.
행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계절에 행복을 꿈꾸는 시인이 되고 싶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도 장관이지만, 붉그레지는 석양도 참으로 아름답다. 
희망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노을에 비친 밤바다가 평온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은빛 억새의 물결이 파도를 잠재운다. 불붙은 가을 단풍들은 패션쇼 준비에 바쁘고, 풍성한 황금 들녘엔 넉넉한 가을바람이 물결친다.
가을은 남성의 계절, 아마 나도 계절병에 걸린 탓일까?
마음이 스잔하고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여니, 초승달과 마주쳤다. 달이 수줍어서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다.
해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계절이 오면, 그토록 고운 빛을 발하며 드높기만 하던 파란 하늘도, 싸늘한 바람결에 멀어져만 간다. 수면으로 깔려오는 물새소리 들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던 그의 고운 자태도 이렇게 정녕 멀어져만 가는가. 그렇게도 마지막 연결고리에 매달려 안간힘 쓰더니, 끊어져 처량함으로 나뒹굴며 흩어지는 낙엽 같은 인생이여! 잿빛 하늘에 마음은 움츠려 들고, 허전한 심연(深淵)속에 아쉬워 운다.
그토록 그리운 님의 얼굴도 가버리는 가을과 함께 희미해져만 간다. 찬 서리 맞으며 피어나는 국화향기도 코끝에서 입맞춤하며 낙엽 따라 슬픈 가을이 저만치 간다.   
‘낮달’수필집 “고령문고와 대구 교보문고”서 판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