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목에 차오르는 엊그저께,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아내와 뜬금없이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버스에 몸을 맡겼다. 해마다 이맘때면 수능을 앞둔 학부모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영롱한 오색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뱃속에서는 꼬록꼬록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관음사에 들렀다가 간다면서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갓바위 너머 약사암에서 무료 점심공양을 할 생각으로 정신없이 올라갔다. 금세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동자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산 중턱 쯤 올랐을까? 쉼터가 있는 곳에 부부 한 쌍이 간식을 먹고 있었다. 나도 좀 쉬었다가 갈 생각으로 그들 옆에 앉았다. 그들은 준비해온 자두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가뜩이나 허기가 지는 참에 그들이 먹는 새콤달콤한 자두가 그렇게 맛있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군침을 흘리며 한개 만이라도 얻어먹고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인생나이로 5학년 2반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비닐봉지에 든 남은 자두 한 알을 직접 나에게 주기는 그렇고, 남편에게 건네주라고 눈짓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편이 전해주는 자두를 얼른 받아 고맙다고 인사하고 한 입 깨물었다.
  물도 한 병 들고 오지 않은 나는 알거지 신세가 되어 달콤한 자두를 맛있게 먹었다. 침침하던 눈이 금세 밝아왔다. 허기진 뱃속에 들어간 자두는 힘을 솟게 했고, 허기를 면하게 되어 단숨에 그들과 함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야구 용어에 ‘적시안타’라는 말이 있다. 산발적으로 많은 안타를 쳐도 점수가 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아주머니가 친 타구는 적시안타였다. 난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눈치를 얼른 알아차리고 적시안타를 친 것일까?
자두 한 알의 보시! 돈으로 치면 몇 백 원에 불과 하지만 허기 속에 먹은 한 알의 자두가 내겐 수십만 원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약사여래불 앞에서 그들 부부와 난 수없이 절을 하였다. 마침 그 아주머니가 내 바로 앞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약사여래불에 절을 하면서 미륵불과도 같은 그 아주머니께도 복 받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절을 했다.
아내는 관음사에서 예불을 마치고 다른 길로 오느라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약사여래불 앞에서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그들 부부와 우리는 주소와 전화를 묻고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며 언제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약속까지 했다.
우리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야 약사암에 도착하여 밥 두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했다. 시장이 반찬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한 말인가. 멀건 우거지 국물에 밥을 말아서 소금물에 절여진 장아찌 한점 씹으니 꿀맛 그 자체였다. 금상첨화로 옆에 앉은 아줌마 부부는 통김치를 집에서 가지고 왔다며 김치보시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 준비 없이 갓바위를 찾은 우리부부는 앞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서 남에게 보시도 해가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다짐을 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남을 배려하는 좋은 사람도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갓바위를 내려오면서 아무 준비 없이 칠월 소 마냥 입만 가지고 남에게 신세진 것을 후회하면서, 우리도 남들에게 보시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두 한 알의 보시! 언젠가 나도 적시안타를 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보면서.
우리 부부는 하산 길에 군밤과 엿을 두 봉지 사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적시안타는 아니지만 그나마 마음이 후련했다. 그것도 보시라고 이름을 구태여 붙인다면, 군밤 보시요, 엿 보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진홍빛 붉게 타는 홍 단풍 그늘 아래 내 마음도 활활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