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면 그 콘텐츠(내용)가 마치 화수분처럼 끝없이 나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역시 고향은 고향인 것을….
얼마 전에 법산 얘길 한 번 했다. 법산 앞 냇가 천렵꾼 얘기와 노천탕(?) 얘기만 했으니 그야말로 간만 보고 만 형국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순후한 농촌 풍정 한 단면의 얘기였고 당시로서는 그냥 잊어버리고 말기엔 그 에피소드가 너무 강렬히 남아 있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 것이다. 재치와 해학을 말할 때마다 기억이 되살아나 나 혼자 실없게 웃고 만다. 민족의 대명절 설이 바로 코앞이다. 우리 민족에서 설의 의미는 각별하다. 잡다했던 묵은해를 보내고 한 해를 새로 시작한다고 해 새해 세수(歲首)라고도 하고, 시제를 지내고 그 해의 운수를 비는 덕담을 나누며 새해 새아침을 맞는다. 친인척은 물론 온 동네가 주고받는 설 인사인 세배야말로 농경사회의 참모습이었다.
일성대촌 우리 법산에서는 어른이 계신 가가호호, 빠짐없이 세배를 가는 것이 통례로 돼 있었다. 다 다니고 나면 해가 서산을 넘기가 예사였다.
다음 날 낮부터는 윷놀이(擲柶戱)판이 벌어지고 그네를 타고 널뛰기도 했다. 고용살이 머슴도 정월 한 달은 소죽도 끓이지 않고 땔나무 한 짐도 않는 것이 상례였다. 밤이면 이집 저집 모야! 윷이야! 하느라 온 동네가 소란스럽다. 남녀노소, 유유상종, 끼리끼리 정겹고 흥겨운 밤을 보낸다. 우리 고유의 풍정을 연출한다. 1년에 한 번 있는 명절을 이렇게 보내며 평화로운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곧 이어지는 대보름의 달맞이 행사.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을 울리고 마당밟기와 지신밟기 행사도 빠지지 않는데 이는 결코 샤머니즘이 아니라 우리 전래의 기복신앙의 발로였다.
정월 대보름은 뭐니뭐니 해도 그네뛰기가 압권이리라. 처녀들이 평소는 조신을 하다가도 대보름의 그네뛰기는 방년의 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연분홍 치맛자락을 한껏 휘날린다. 방년들은 조신 때문에 억눌렸던 끼를 이때다 하고 남김없이 발산하고 동네 총각들은 덩달아 마음이 설렌다. 이런 것이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것일까?
세시풍속은 또 있다. 다가올 한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토정비결을 빼놓을 수 없다. 길흉에 희비를 교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재미로 본다는 사람도 있다. 또 그중에는 길은 흉이고 반대로 흉은 길이라는, 즉 거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보름 전날 밤중엔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堂山祭)도 지낸다. 우리 법산엔 진수봉이라는 당산이 있지만 어느 마을이나 지정된 당산이 있는 것이 통례이다. 그 제주(祭主)는 다사다난한 인생사에서 흠결이 없는 사람이 맡는다. 흠결이 없다는 것은 도덕적 흠결도 중요하지만 아내·자식 구존(俱存)하고 가정사 흉사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정한 일을 보지 않아야 하고 목욕재계하고 하루만은 근신해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제를 올린 제수(돼지머리)는 제단 밑에 파묻는 것이 관행이었다. 장난꾸러기 악동(惡童)(?)들이 그걸 캐먹으러 간다는 소리는 듣기는 했어도 먹었다는 소린 듣질 못했다. 달맞이 행사도 빼놓을 수 없는 세시풍속 중의 하나이다. 마을의 수호신이 산다는 당산(堂山)에서 농악대가 출동하고 달불집 태우는 행사로 정월 대보름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달불놀이이다.
동녘이 벌개 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뚫어져라 하늘만 쳐다보다 달 모양에 가까운 구름덩이만 보고도 한 사람이 ‘달봐라…!’ 하면 누구 하나 확인할 겨를도 없이 ‘달봐라!’의 코러스(합창곡)가 약속이나 한 듯 터져 나온다.
그냥 남을 따라만 해도 달은 언젠가는 뜨고 말 테이니 굳이 보고 못 보고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달은 떴고 달을 가리키며 무슨 위대한 발견(?)이나 한 듯이 한참을 소리만 지르는 사람, 합장하고 기도 하는 사람, 절만 해대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나의 고향 법산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인 작천, 꽃질, 가까운 운수면 일부도 산꼭대기마다 축제의 연기가 초저녁 노을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런 정겨운 풍광을 언제나 또 보게 될까? 산업화도 좋고 ICT시대가 초음속으로 발달해가도 다 좋지만 이제는 아련히 떠오르는 회상으로만 만족해야 하다니 참으로 허전하다.
오늘에 와서 또 이러저런 세시풍속을 다시 보기는커녕 더욱 멀어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만 헛헛해 옴을 금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