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싫어! 12월이 싫어!
12월이면 나는 뭔지 모를 공허감의 엄습으로 이름 모를 병을 앓은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명색이 문필인이라고 어쭙잖게 공인(?)은 받았지만 아직은 늘 허전하다. 뭔가 늘 부족함에 시달리며 오르지 못 오를 나무만 처다 본다. 피안지화(彼岸之火)만은 아닐 텐데 말이다.
내 20대 때의 회상이다. 당시 어느 지인 문학청년은 자기만이 희구하는  이상형의 여성을 연모하면서 읊조리는 시구가 있었다. 그때 작자는 누구라고 말은 했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걸 기억할 수가 없다. 그만큼 ‘문학’은 하고 싶었지만 문예지 하나도 사볼 수가 없을 만큼 여건은 불비했고 또 딱히 문학을 하겠다고 작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인 그는 그 어렵던 시절에 라디오와 다소의 책자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는 문학에 관한 한 한 발 앞서가고 있었다.
그 지인 애송시의 시구는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였다. 아마도 그 시인은 사랑했던 여인과 헤어진 곳이 월하미인(月下美人·밤에만 피는 선인장꽃)이라 하듯 달밤이었던 모양이다. 별빛도 반짝반짝, 교교(皎皎)한 달빛이 산하를 비취이던 밤이었던 모양이다. 형형(炯炯)한 눈빛처럼, 얄밉도록 환히 웃는 밝은 달밤에 잡은 손 매정스레 뿌리쳤던 여인과 해어졌으니 그 달밤이 싫었던 것이었다.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은 그 시인은 작시를 했고, 이 시를 접한 지인은 음유(吟遊)시인이 되었듯, 나 또한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서 허허로운 ‘12월이 싫어…’를 속으로만 되뇌고 있는 것이다. 새해 유력 일간지들은 어김없이 신춘문예 당선자를 발표한다. 시, 단편, 평론뿐이었던 것이 지금은 7,8개 부문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나는 없다. 당선자 프로필이 나오고 웃음 가득 사진도 찍는다. 프로필도, 사진도 보았지만 나는 끝내 없다.
전도양양한 청춘들의 얼굴 속에 백발인 내가 거기 낄 수가 없었다. 신문은부조화의 그림판이 되길 싫어했던 모양이다. 조금 보다 신문을 덮어버렸다. 에이! 내년에나….
나 없는 새해 벽두 신문이 싫은 것이다. 며칠을 머리맡에 두고 끝내 들쳐보지 않았다. 사나흘이 지난 다음 펼쳤다. 물론 나는 없었다. 있을 리도 없다.
신춘문예! 내 20대 때 신문 예고만 보고도 가슴 설레던 일이 있었다. 언감생심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당시 이광수의 ‘흙’, 정비석의 ‘소설작법’ 등이나 보던 때 그저 글줄이나 쓰고 남의 편지 대필이나 하던 때에 무슨 작품이 나오겠는가?
그래도 꿈은 곧 버릴 수 없어 50대에 이르러서야 처음 단편에 응모했던 것이다. 헛된 야무진 꿈도 꿨던 것이 사실이다. 만에 하나 당선 소식을 듣는다면 버스·지하철 가리지 않고 벅찬 가슴 억누를 겨를도 없이, 야! 나도 이제 소설가다! 나 혼자 환호작약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은 야무졌지만 현실은 냉엄하기만 했다. 가상은 헛헛하기만 했다.
매년 당선작들을 읽어본다. 이런 유(類)의 작품이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고 자만도 했지만 그 치열한 경쟁에서 1등이 되기란 정말 어려웠을 것이었다. 장르별로도 작품 수가 기백을 헤아린다니 말이다.
-심사위원 책상에는 응모 작품이 산더미다. 저걸 언제 다 읽고 심사하나? 무작위로 한 편을 집는 것은 아닐까? 아내는 가사 불고하고 집필실에만 매달린 남편에게 심한 투정을 한다. 기일의 촉박함을 감당 못해 그냥 집히는 대로 당선자를 결정한다-.
  하도 안 되니까 심사 시스템에 대한 역린인줄 알면서도 오만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문도(文道)를 거슬러 이나마의 문필도 영구 퇴출의 멍에를 쓸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가 상상의 산물이니 금도는 상당히 일탈했지만 그 자체로는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어느 노벨상 수상 작가는 타계 1년 전(2010년), 불경스럽게도 구약성경을 개작하면서 까지도 마지막 소설을 썼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눈으로 여호와를 재조명하고 여호와의 악의를 들춰냈다.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여호와의 독선이 빚은 결과이기도 하다”고 설파한다. 내가 감히 거장의 작품에 빗대는 그 자체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지만 내 상상이 궁색하니까 인용해 본 것이다.
신춘문예! 문필인에게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내 일찍 꾸었던 꿈이니 ‘신춘’만 들어도 가슴이 움찔함을 피할 수 없어 한 번 써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