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으로 직장을 절제(切除)한 지 1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이후 배변이 어려워졌다. 그나마 소화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횟수는 물론 시간도 하루는 걸린다.
정상인도 습관이 된 사람은 신문 나부랭이나 책을 들고 화장실 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나는 아예 한 번에 한 시간이 소요되니 일간지는 물론 간혹 탐독해야 할 책을 미리 비치해 놓고 서가에서 꺼내 읽듯이 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지필묵도 준비돼 있다. 이름 해 ‘화장실이 나의 독서실’이 된 지 오래이다. ‘읽기’만이 아니라 ‘쓰기’도 자연스럽게 한다. 글은 사유(思惟)의 산물이다. 사유는 길을 걷다가도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생긴다. 달리는 차 안도 마찬가지이다. 즉시 메모하는 습관도 생겼다. 사유는 메모로 이어지고 메모는 곧 나의 ‘쓰기 교실’이 되는 화장실로 연결이 된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상당 부분이 ‘화장실’이라면 심한 억지일까?
60년대 어느 저명한 교수가 그의 칼럼에서 본인을 ‘메모광’이라고 이름 하는 것을 보았다. 문필로도 교수 명성 그 이상의 분이었는데, 언제 어디서나 글감이 떠오르면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 이를 빗댄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감히 고명한 그분의 흉내도 낼 수 없지만 나도 나름으로는 상당한 메모벽(癖)이 있다.
낮에 종일 한 어휘를 두고 선뜻 취택을 못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야 번뜩! 하고 떠오르면 바로 일어나 메모를 해둔다. 그것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뇌에 저장하는 기억만으로는 감당키 어렵게 되어 선택한 나의 버릇이다.
그 주제, 그 문장에는 그 어휘가 들어가야 문맥이 사는데, 이 말 저 말 찾다가 아! 그거 하고 떠오르면 메모하는 수밖에 없다. 이름 해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라 하던가.
문맥상 토씨 하나가 문장 전체의 성패를 가름하게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조금 과장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하면 지나칠까?
그 떠오르는 생각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복잡한 차내에서건 길거리서건 심지어 화장실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책상에서 쓰는 것보다 더 유려(流麗)(?)한 문장이 나온다고 할 정도이다. 그런데, 60년대 고교 국어책에 실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여러 예문 중 유독 각인된 기억 딱 한 가지가 남아 있다.
한때 정말로 사랑했던 애인이 어느 재벌의 내연녀(세컨드)가 되어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뒤에서 봤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런 글이 그때는 왜 그리도 애상(哀傷)으로 다가왔을까? 아마도 그것이 바로 꿈 많을 청소년일 때의 정서가 아닌가 한다.
그랬는데, 20대의 초반이었으니 얼마동안 메모리가 돼 있었지만 망각이라는 증후군 앞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했다. 그때 어디 일기장에라도 메모를 해 뒀으면 작가가 누구이며 슬프게 하는 여러 사례 중에서 한두 가지는 건졌을 텐데 말이다. 다만, 작가는 ‘안톤 슈낙’이라는 문필인이 아닌가 하는 흐릿한 기억은 갖고 있다. 여기 더해 서구사회도 세컨드를 용인(容認)했었구나 하는 것만은 분명히 남아 있다.
일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퍼뜩 착상 하나가 떠올라 바로 내려 신문지 귀퉁이에다 끼적이고 있었다. 옆에서 유심히 쳐다보던 행색도 상당한 한 할머니가, 우리들 세대는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유교 사회의 잔재 때문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하며 내게는 격려성 제스처를 주는 것도 같았다.
나의 독서실 겸 집필실! 내 비록 잡문 수준이지만 그렇게 써온 지가 십 수 년이 되었다. 하긴 바로 실토 하자면 그 암수술 이전에도 생업 때문에 장소 가리지 않았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나의 ‘얼뜨기 문필인’은 언제 면하며, 명문대작은 언제 나오려나? 나오기나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