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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토지의 작가 박경리(朴景利)님이 생의 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했던 듯 최후로 남긴 소회가 ‘버리고 갈 것이 많아 좋다’였다. 역시 생전 큰 행보의 명성에 맞는 마지막 족적을 후학들에게 남겼다.
내 얼마 전 이사를 앞두고 책을 정리하다 쓸 것 버릴 것을 OX로 결정한 일이 있다. 어떤 책은 오늘은 O, 내일은 X가 되는, 생사의 갈림길도 아슬아슬 행보였다. 눈물을 머금고 버릴 것을 결박해 놓고 나서, 명색이 글쟁이(?)인데 이래도 되나 하고 적어본 것이다.
내가 널 버리다니! 너의 혼이 내게 들어와 눈을 뜨게 하고, 내 오늘을 있게 했지. 가난한 내 영혼 널 찾아 살찌우고, 잠든 지혜 너로 하여금 일깨우고,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널 찾아 갈증을 해소했다.
사노라면 간절히 필요한 것도 있고 절절한 염원도 있어 그것을 네가 가르쳐 줬을 땐 나는 무릎을 치고 길길이 뛰며 기뻐도 했다.
내 수족이요 분신이요 나의 전부였는데 그런데, 그런데 널 보내야 하게 되었다. 떠나가야 하는 너, 헤어져야 하는 너 떠나보내기 싫어 잡았던 손 놓지 못하고, 놓았던 손 다시 잡고 네 얼굴 다시 만지고 쓰다듬고…. 그래도 난 보내야 하고 넌 가야만 한다.
1kg에 단돈 70원(폐지 재활용 값)을 받고 팔아야 했다. 을사오적신은 억만금을 받고 자신도 나라도 팔았지만 난 널 그 알량한 70원을 받고 사지로 보내야 했다. 일시적 이성도 마비돼버린 나, 길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혼이 깃든 널 몰라주다니….
땅을 치고 가슴을 쳐야 하는 무력한 나였다. 넌 나를 배은망덕이라고 탄식하고 원망했겠지? 아스라이 들리는 네 목소리를 뒤로하고 기어이 널 보내고야 말았다.
너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 맞이했다가 비정하고 모멸차게도 버린 나는 정녕 사이비이거나 이율배반이 되고 말았구나.
발길 무거운 너 가는 것 차마 볼 수 없어 외면도 해보고 잊으려고도 했다. 입양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야 천재일우 다시 만날 기약이라도 하지만, 비정한 쇠갈퀴에 옆구리를 찍혀 갈가리 찢어질 지도 모르는 너는 행여 구사일생 희망을 갖는 것은 아닌지 그게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네 팔자 기구하여 나와 함께 한 그동안 격식 차린 예우 받지 못했고 종내는 포승줄에 묶이어 차디찬 마룻바닥에 집행 유예기간을 두듯 며칠을 처박아 놓기도 했었구나.
용광로로 갈지 물벼락을 맞고 짓이겨 질지 그 길목에서 서성일 때 생사를 초탈하여 옥쇄(玉碎)하기로 체념하고 있을 때 혹여 박애의 독지가가 책으로서의 사명을 다 하라는 구원의 손길이나 닿았으면 좋겠다고 행여나 하고 바라기도 했던, 참 뻔뻔한 나였다.
내 널 어쩌면 소신(燒身)의 문턱까지 몰아치고 나서 가까스로 환생을 바라기도 했다니 이 무슨 비뚤어진 심사인지 모르겠다.
어쩌다 내게 불시착하여 남만큼 사랑을 받지도 못하다가 장렬히 최후를 맞게 될 너에게 이르노라. 내게 와 박대 받았지만 소신하여 윤희의 덕으로 다시 태어나 사랑받고 예우받기를 기원하노라. 이제 와서 ‘흙 묻은 옥이 목욕재계’하여 호화스런 서가에 꽂혀 뭇사람이 보고 네 위상을 회복하고 칭송받게 되라는 내 몰이성, 몰염치를 용서하거라. 마치 불효하고 용서를 비는 불효자인 듯, 버릴 때는 언제이고 다시 살아나라는 모순을 저지르는 내가 천학비재(淺學非才)라서 그럴까? 아! 나의 천박한 사고(思考)를 탓해야 하는가…….
이사를 가자니 버릴 것은 또 있었다. 숟가락이다.
너는 나의 시작이다. 내 처음 이 세상에 나와 너를 만나 시운전을 할 때 사람들은 축하해주고 폭소가 터지며 박수까지 쳐 주더라. 무엇이 그리도 좋은 일인지 그땐 몰랐지만 그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너 모양도 여러 번 바뀌었다. 내가 클 때마다 너 체형도 크기도 바뀌었고 재료도 놋(鍮器)에서 은으로 고급화가 되었다. 시운전할 때의 축하나 고급화가 된 까닭은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었다.
때로는 널 혹사시키기도 했고 그런 날은 내가 더 괴로웠다.
몸져누워 입맛을 잃을 때면 너는 내 손안에 안겨 일 시켜달라고 채근을 했기 때문이었지. 내 어쩌다 제풀에 화가 난 날 죄 없는 널 멀리 하기도 했고, 영문도 모르는 너를 내동댕이치기도 했지. 그래도 넌 말이 없었고 다시 너를 잡았을 땐 내가 멋쩍어 나오는 웃음을 ‘에잇 참…’으로 얼버무리기도 했지. 항상 위험한(뜨거운) 곳에는 널 먼저 들여보냈고 고추당초 매운 곳도 네 차지였지.
솥 밑바닥 청소도 네 몸뚱이가 닳고 찌부러지도록 일해야 했었지.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너와 내가 만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너 없는 나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 있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너와의 운명적 만남이 끝나는 날 사람들은 ‘닦아 얹어 놓는다’라고 하더라. 내 끝난 삶을 미화(美化)하는 말인지 빗대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말 속에 너도 포함되겠지? 사람들은 어쩌면 야속하기도 하지?
내 감히 이런 말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박경리 선생은 역시 대가이셨다.
“……많아 좋다”고 소회를 피력할 때 그 인간 본연의 심상(心傷)은 어땠을까? 회한은 없었을까, 무아경의 해탈의 경지였을까…….
모든 것 다 내려놓으시고 영면하소서!< 저작권자 © 고령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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