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기골은 성산면 기산리 마을 정면에서 남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산골짜기다.
예로부터 항기골은 아흔아홉골짜기라 하여 골짜기 하단 중앙에 쌍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어서 나의 어린 시절은 깨끗하고 파란 저수지물을 손으로 퍼마시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초등학교 5~6학년 무렵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소를 몰고 항기골로 올라가 하루 종일 소를 방목해두는 일은 나의 차지였다.
하교 후 친구들과 소를 찾으러 갈 때 개울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개울가 돌밑을 살펴보면 하얀 모래가 나온 곳에 돌을 들추면 반드시 가재가 있다.
가재는 1급수에서만 살 수 있기에 요즘은 보기가 쉽지 않다.
마른 솔가지를 주어다 불을 피워 구워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보면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소를 찾으러 간다.
대부분의 소들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산 아래로 내려오지만 어떤 소는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거나 다른 골짜기로 넘어가서 애를 태우기도 했다. 결국에는 당일 소를 못 찾고 다음날에야 찾는 일도 가끔 있다.
항기골 주변에는 수많은 골짜기가 있어서 간혹 소를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듣고 부르기만 해도 정겨운 내 고향 산골짜기들을 열거해보자.
마을에서 산을 바라보며 오른쪽에서 모매상골, 작은똥상골, 큰똥상골, 이낭골, 등골, 소태낭골, 팔박깨월, 깨진만당, 막터, 망골, 망골큰양지, 망깨만당, 심심골, 가는골, 용의머리, 큰절골, 작은절골, 헐래골, 등돌배기, 곰보바위, 땅골옆뙤기, 그리고 마지막 공동묘지 등 모두가 내 어린 시절의 정겨운 이름들이다.
당시 산에서는 다람쥐, 산토끼, 오소리, 고라니, 너구리를 비롯해 늑대, 여우, 노루나 멧돼지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과 꿩들의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렇듯 청정 골짜기였는데, 언제부턴가 광산이 생겨 다이너마이트 소리에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 자연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물론 쌍저수지도 예외가 아니어서 흙탕물이 되었었다.
그 시절 겨울철에 나무하러 가던 나뭇지게를 엎어놓고 썰매를 타고 놀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쌍저수지가 지금은 세월이 흘러 다소 정화가 되었지만, 그 옛날 청정 물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옛 생각이 떠올라 붕어를 사다 방생도 해 보지만 쾌쾌한 흙탕물을 헤집고 다니는 붕어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산은 인간에게 많은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봄철에 산에서 돋아나는 고사리, 취나물, 쑥, 산도라지, 옻순 등 산나물이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가을철에 알밤을 비롯해 잣, 도토리 등도 산에서 제공하는 먹을거리지만 사람이 줍지 말고 산짐승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멧돼지나 노루, 고라니 등 산짐승들이 먹을 게 없으면 결국에는 농작물에 눈독을 들여 농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경제발전 덕분에 우리가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넘쳐나는 먹을거리 속에 살아가고 있어서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것은 기본에 속하고 산짐승에게도 배려해야한다는 게 올해로 희수(喜壽)를 맞은 나이에도 그 마음 떨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