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이든 현대사이든 역사 얘기는 여러 의미에서 흥미가 있고 재미도 있다. 적어도 내 안식(眼識)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더구나 광복 전후의 얘기는 내가 보고 듣고 체험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 시대를 살았으니 정사(正史)로의 자리매김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민심 이반을 촉발했던 자유당 말기의 3.15 부정선거! 각지에서의 소요(騷擾)는 요원(遼遠)의 불길처럼 일어났고 마산 ‘김주열’ 사건은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4.19의 촉매가 되었다. 최고 지성 서울대학교 교수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시위를 결행했으며 이것이 자유당 정권 붕괴의 단초가 되기에 이르렀다.
교육열이 높아진 오늘의 시대상과 당시의 대학을 비교한다는 것은 노리상 맞지 않다. 다만, ‘상아탑’이라는 화두의 함의(含意) 하나로 당시의 대학을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더 이상의 적확(的確)한 표현은 없으리라.
어쨌던 희망찬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부정·불의에 대한 항거의 총본산 대학사회는 나름대로 위대한 민권승리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애국하는 길을 찾는 듯하더니 학생들은 농촌봉사활동에 본격 나서기도 했다.
20세 초반인 나는 주경야독으로 문학하겠다고 정비석의 ‘소설작법’, 저자 미상의 ‘문장강화’를 탐독할 때였다. 당시, 고교 재학 중 신병을 얻어 휴학 중이던 동년배의 지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갔더니 서울대학교 사대생 남녀 서너 명이 와 있었다.
그들은 4.19 이후 전국 농촌에 파견되어 청소년에겐 공부와 진로 문제를, 부녀자들에겐 생리 등 건강생활에 대해 강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박2일의 일정을 마친 그들은 돌아갔고 지인은 내게 물었다. 저들이 나라를 위해 저러는데 우리도 뭔가는 해야 하지 않겠나 했다. 내가 야학을 열자고 제안했다. 광복과 6.25 전후 천자문과 ‘동몽선습’으로 한자공부를 하는 사랑방 서당이 있었음을 내가 보고 자랐으니까 말이다.
당시의 시대항은 ‘국민소득 60달러’였다는 말 한마디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 때 중학 진학은 초교 졸업생 중 20% 내외였고 문맹자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국민의 3~40%나 됐을 것이라 짐작만 하는 것이다. 공부는 내가 하고 싶었는데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 야학을 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있었던 중학교 과정 통신가의록 교재로 60여 명을 가르쳤다. 농업이 주산업일 때이니 ‘농투성이’(사투리로는 농태산이)라는 다소 자학(自虐) 아닌 자학을 스스럼없이 토하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호응도가 좋아 이웃마을에서도 왔다. 내가 군 입대 전까지 했으니 한 2년여를 했던 것이다.
지금은 젊은 날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고 겁 없이 뭔가라도 해보자고 거들먹거렸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농촌계몽운동의 효시(嚆矢)는 경기도 안산의 최용신(崔容信.1909~1935)이다. 일본 유학 중 국권 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오로지 민족교육 일념으로 중도 귀국길에 올랐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선각자적 혜안으로 청석골 샘골마을 교회를 빌려 계몽교육을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꽃다운 26세의 나이로 건강 악화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를 모델로 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일세를 풍미했으며 영화로도 국민들 가슴에 각인이 되었던 것이다.
최용신은 시대가 요청한 농촌계몽운동의 화신(化身)이라 할 정도로 열정의 표상이었으며 이분이야말로 우리 민족 근현대사의 교육 여명기에 혼을 불사른 선구자였다. 그의 사후 공을 기려 여성단체에서는 용신봉사상을 제정했으며 국가에서는 건국훈장 애국장도 수여했다.
역사는 ‘되돌이’를 한다고 했던가. 4.19 이후 각 대학이 하나의 시대 조류이듯 일부는 정치 현장에, 일부는 농촌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래서 나의 법산에도 서울대 사대생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5.16이 있었고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이 강력한 정부지원 아래 민간주도로 추진되니 농촌계몽운동은 퇴조를 맞았다. 형태는 아주 다르지만 다시 그 운동이 지금 각 대학에서, 농활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적으로 부활하고 있으니 역사는 되돌이라고 해보는 것이다. 시대 따라 유행 따라 의상의 패션이 변하고 때로는 복고풍이 되듯 사회 현상도 이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의 농활은 양태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의 농활은 운동권 활동의 상징이었으며 한미 FTA반대 논리 교육도 있었고 정치색 짙은 의식화 교육도 받아 농민들에게 전수도 했지만, 지금은 사회봉사와 학생들 스스로의 지.덕 교육의 일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려워지는 대학생활에서 학점등 현실적인 인센티브가 있고 소정의 봉사시간을 이수하면 1학점을 인정해 주기도 한다고 각 대학들은 말하고 있다. 대학의 별칭 ‘상아탑’에만 안주할 수 없음이 오늘의 현실사회이며 시대변화의 한 단면은 아닐까 하는 내 소회를 피력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