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관내 퇴직 공직자 모임인 행정동우회에서 30주년 동우회지 창간호에 원고 청탁을 받고 습작에 불과한 ‘열정의 불꽃’이란 짧은 수필 한편을 실은 적이 있다. 문학적 작품이라기보다 대충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이야기였는데 동우회원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고 여기저기서 문자가 들어왔다. 은퇴 이후 매사에 당당함과 넘치는 열정으로 보람을 찾는 뒷모습이 너무 건강하고 멋져 보인다고 한다.
57세의 정년퇴임으로 젊지도 늙지도 않는 나이에 다시 말해 중늙은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지만 내 인생의 공식 무대 은막은 비록 내려졌다 하더라도 내 삶의 은막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뜨거운 열정이 내 가슴에 아직도 식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일터를 찾아 나섰지만 요즘처럼 일자리가 귀한 세상에 중늙은이에게 입에 맞는 직장을 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때로는 허허벌판에 홀로선 외로운 사람이 된 느낌만 들었다.
새로운 도전은 또 하나의 꿈을 향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일터를 찾아 여러 곳에 문을 두드리며 노크를 해보았지만 반갑게 기다리며 문을 열어 주는 곳은 없었다. 아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퇴직 공직자의 가슴 한구석에 매달린 자존심도 깡그리 날아가고 허무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때 순간 오기가 맨살에 돋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은 열려는 사람에게 틀림없이 열리는 법이다. 퇴직 2년차 되던 해 산림녹화기념숲(일명 수목원)에서 녹지관리원으로 채용이 되어 새 일터에서 바라던 일을 하게 되었다. 수목원에서 주로 해야 할 일은 국화를 키워서 작품전시회를 총괄 준비하는 막중한 일이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 많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100만송이나 되는 엄청난 대·소국 국화작품을 수만 번의 손길을 거치면서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심혈을 기울인 결과는 성공적으로 큰 전시회를 연속 2년간 개최하게 되었다. 국화 축제가 열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갈채를 받았던 일은 내 자신도 놀랄 일이였고 정말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수목원 국화 전시장을 찾은 수만 관람객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 일은 그동안 땀 흘리며 고생도 많았지만 큰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 작은 손으로 엄청난 100만송이 국화를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집착과 몰두였다. 내가 미쳐야만 남을 미치게 할 수 있다는 철학을 그때 체험하면서 한 가지 일에 미친 듯이 정신없이 쏟아 붓는 결과는 엄청난 결실을 얻게 되었고 뜨거운 열정, 그것은 무섭고 위대한 힘을 발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작은 가슴을 벅차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실한 매너와 능력을 군민들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에게 또 하나의 용기와 자긍심을 얻게 된 사실이다. 수목원에서 국화와 함께 두해를 넘기고 아쉬움을 남겨두고 나를 필요로 하는 지금의 농협에서 특수 전문직인 영농지도사란 직함으로 스카웃되어 일터를 옮기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농촌은 노령화로 더욱 힘들고 FTA라는 거센 파고 앞에서 농민들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지고 큰 어려움을 겪으며 시름에 허덕이고 있다.
이 어려움을 함께 걱정하고 거센 파고를 헤쳐 나갈 방법들을 같이 고민하면서 농업현장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영농기술 지도와 상담 등 전직 농촌지도직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농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농지도사로 일한지도 어언 4년차가 되었다. 그동안 새 일터에서 해온 일들 중에 특히 친환경 농업에 활용하는 유용미생물 배양사업을 농협 환원사업으로 제안하여 전국 최초로 농협자체에서 미생물배양장을 운영하게 된 점은 전 조합원들로부터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른 아침이면 미생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배양장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는 광경을 보면서 스스로 감탄도 해보고 ‘굿 아이디어’였구나 싶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기도 한다. 새로운 농법으로 친환경 농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괄목할만하고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받아 이것이 모델이 되어 인근 농협으로 크게 확산되면서 급부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나 내손이 필요하고 나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신바람나는 하루가 너무 바쁘지만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재미로 오늘을 살아간다.
인생을 언제나 청춘으로 되돌리며 살아가는 나의 비결이 있다면 바로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넓은 세렝게티 초원에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면 매일아침 가젤이 잠에서 깨어나 달린다. 가젤은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오늘도 가젤은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할 것이다. 역시 매일아침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 달린다. 사자는 가젤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오늘도 사자는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릴 것이다. 해가 뜨면 달려야 한다. 내가 사자든 가젤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하루를 힘껏 달리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진정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다만 내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식어가는 것이 정말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