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문구류가 필요해 동네 초교 앞 문구점에 갔다. 이게 웬 일인가. 수삼일 전까지도 있던 문구점 간판이 내려지고 없었다. 마침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선풍을 일으킬 때였으니 어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나…, 하고 헛된 상상을 하고 말았다.
학교와 문구점! 적어도 인구팽창과 산업화 시대로 줄달음 칠 땐 이 둘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바늘과 실! 억지로 꿰맞추면 신랑과 신부! 어쨌거나 밀접한 관계임은 틀림없으리라. 조선시대 선비하면 문방사우가 제일 먼저 떠오르듯 학교하면 문구점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내 큰아이 초교 입학 때는 세 개나 있었던 문구점이 점원을 두고도 바쁘게 움직이며 활력이 넘쳤는데 지금은 아예 흔적조차도 없게 됐으니 세상 변해도 어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시대 따라 변하는 것이 어디 한둘일까만 유독 문구점이 사라져감에는 남다른 소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한 것은 단기 4280년이다. 그땐 ○○공립국민학교라 했다. 갓 광복된 나라에 뭐 변변한 학용품이나 있었을까만 그나마도 나는 4학년이나 돼서야 겨우 공책과 연필이라고 사본 것이다. 위로 두 형이 쓰던 것을 썼으니 살 일도 없었다. 크레용이라고도 있긴 했지만 아예 산 일도 없다. 연필도 못사는데 웬 크레용…? 수묵화(水墨畵)이듯 흑과 백으로만 그림을 그렸었고 노트는 큰형이 면서기였으니 가져온 이면지를 실로 꿰매 공책을 만들어 쓰다가 6.25 이후 4학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문구점(그땐 문구점, 문방구란 말도 없었으며 그저 점빵店房이라고 했다.)을 이용하는 호사(?)를 누렸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경제발전의 양태는 어느 한 부문만의 일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총체적이다. 오늘의 이 나라가 이렇게 중진국 대열에 선 것은 한 때 성업을 누렸던 문구류 사업도 한 몫을 했다는 말이다. 그랬던 문구점이 아예 자취를 감췄으니 왜 소회가 없겠는가. 그 이유를 지인에게 물었더니 각종 학용품은 1년 쓸 분량을 학년 초에 구입하여 쓰고 그 많은 준비물은 학교에서 나눠주니 개인이 구입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꿈같은 얘기이다.
산업화의 큰 물결 따라 사양길을 가는 업종도 각양으로 나타나는데 골목골목을 차지하고 있던 구멍가게도 예외는 아니다. 소득이 높아지며 소비 형태도 변해감을 누가 막겠는가. 어쩌다 속골목 깊은 곳에다 그나마도 명맥을 유지하는 구멍가게가 미니슈퍼라는 간판을 걸고 장사는 하고 있지만 또 언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렵던 시절 이른바 서민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구멍가게! 어린이들에겐 잊을 수 없는 연탄불 그리고 ‘달고나’가 있지 않았는가?
일전 모임에서 관광길에 나섰는데 일박한 곳이 대형도 아닌 좀 낡은 중소형 온천장이었다. 왜 대형을 예약 안 했느냐고 했더니, 실상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온천이 개발되어 국내에서는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온천의 거대 숙박시설이 개문휴업이 아니라 아예 폐업이라는 안내판이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었다. 그 숙박업소 이름이 세계적 휴양지의 하나인 ‘하와이’를 딴 ‘부곡 하와이’였지만 화려한 네온의 불빛도 꺼져버린 그 위용은 어쩐지 초라해 보여 지나는 한 길손의 가슴을 소슬(簫瑟)하게 했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시조‘…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연상케 했다.
 한 때는 한국의 대표 온천장이였었는데 왜 이리 됐는가 하고 물었더니 만병통치 정도로 알던 온천욕의 효과를 굳이 현장까지 가지 않고 집에서나 동네 찜질방에서도 얼마든지 취(取)할 수 있으니 온천장이 사양길을 걸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다소 맥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3차산업인 관광이 국가 기간산업에 못지 않는 중요산업으로 자리 잡을 때 온천이 있는 관광지가 각광을 받았고 온천여행 한 번 못하면 어디 끼지도 못할 만큼 온천 관광이 하나의 유행일 때도 있었다. 피땀 흘린 산업화의 결과는 국민 소득으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중국과 국교까지 열렸으니 자연스레 중국 관광이 잦게 되었다. 너도나도 중국 관광길에 나섰다. 주로 연변 등 조선족 자치주가 대상지였다. 우리와 격차가 심한 그곳 현실을 보고 당시 사회적 현상으로 생겨났던 이른바 우리의 ‘졸부’가 조선족을 향해 비아냥대고 이죽거리기까지 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 현상이 바로 국내 온천관광과 같은 맥락이라 한다면 내가 너무 단견일까?
사진관도 사라진 것 중의 하나이다. 내가 1952년 초교를 졸업할 때 졸업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사진사는 삼각다리가 달린 사진기와 검은 보자기를 함께 둘러 쓴 채 고무주머니를 꽉 움켜잡으면 셔터가 열려 사진이 찍히는 것이었다. 그 삼각다리를 보고 ‘발틀사진기’라 하고 카메라(흔하지도 않았지만 간혹 코닥카메라라는 게 있긴 있었다)는 ‘손틀사진기’라 부르는 사람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도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은 면 단위까지 한두 군데 사진관이 있었지만 아이 백일이나 돌 때에 사진을 찍었고, 국력이 커가며 사진관도 한땐 성업을 누리기도 했다. 70년대에 있었던 ‘팔불출’ 얘기 하나 해야겠다. 내 딸아이 첫돌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쇼윈도우에 걸렸다. 내 지인들이 그걸 보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그 세월이 벌써 40여년이 지나가버렸으니 참 세월은…. 그랬던 사진관이 지금은 구청 앞이나 가야 증명사진 찍는다는 안내 간판이 있을 정도이니 아쉬움 중의 하나이다.
사회 발전이나 나라 발전은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라지려 하는 것들이 삶의 한 역사이며 우리들의 소중한 정서적 자산이었음을 생각하면 못내 아쉬움이 남음을 어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