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통이 심하여 산을 오른 지도 두어 해가 지났다. 산 애호가들에게 왜 산을 오르느냐고 하면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한다지만 나는 ‘산이 내게 못 오니까 내가 간다’라고나 해 둘까…?
추운 날 웅크리고 방에 앉아 있기보다는 나설 땐 이마가 선득선득해도 금세 온 몸이 달군 난로가 되는 그 마력이 부실한 몸뚱이를 산으로 끌어내는 힘으로 작용하는가 보다.
또 더운 날, 자연친화적 초옥도 아닌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모두 회색 콘크리트 숲 속에 갇혀 있기 것보다는 오르느라 숨은 목구멍을 턱턱 막는 듯해도 바람 부는 ‘고지가 저긴데…’라고 생각하니 가파른 길은 평지가 되고 더위는 그 존재마저 잊게 된다. 발아래 펼쳐지는 산하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거창한 의미는 아니어도 좋고 그저 상쾌해지는 것만으로도 정녕 산이라는 존재에 감읍하고 만다.
처음 얼마동안은 몸을 달구고 식히는 맛이 더없이 좋았지만 그것도 조금 지나니 타성이라는 게 생기는지 시들해지기 시작하던 어느 날, 우리 인간 세계와 다름없이 초목들도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 새봄이라 한 군락의 보득솔(작달막하고 가지가 많은 소나무)밭을 지나게 됐는데 같은 종이면서도 약속이나 한 듯 치솟은 새순들끼리 한 치 한 뼘도 뒤지지 않으려 벌이는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전투 같이 보였다.
다시 솔밭을 지나 번식력이 강하다는 아카시 숲 속을 지나다 보니 거긴 바싹 말라버린 솔잎이 마치 다 발라먹고 버린 영락없는 생선 가시를 연상케 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지 않는가. 고사하여 형해화(形骸化) 돼버린 그 몰골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어땠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줬으며 처연(凄然)함을 지나 처절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저 음흉한 일제가 이 강토를 황폐화시키기 위해 가져다 심었다는 그 아카시! 그 등쌀에 민족의 표상이기도 한 고고한 우리 소나무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도 어떻게 서 있었나를 생각하니 처연과 처절이 결코 과장은 아니리라! 어쩌면, 어설프게나마 생활현장에서 경쟁하다 삐끗 낙오하여 산행으로 소일하는 내 모습같이도 보였다면 내 유약(柔弱)함만 드러나는 일일까?
경쟁은 동종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이종에게 자양분을 빼앗겨가며 벌이는 종도 있었다. 담쟁이덩굴이란 놈은 뿌리는 땅에 박고 숙주인 나무를 기어올라 자양분을 탈취하는 것이 아닌가. 동아줄처럼 굵어진 덩굴은 중죄인 다루 듯 나무를 결박하고, 그래도 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려는 듯 함이 처절한 사투로만 보였다는 말이다.
우리들 몹시도 배고픈 시절 어렵게도 얻은 영양분을 그나마도 기생충에게 뺏기지 않으려 회충약을 먹던 일, 소에 달라붙은 기생충을 잡아주면 시원한지 되새김질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던 때가 생각난다. 덩굴에 칭칭 동여매여 그 숨소리는 마치 절명 직전의 중환자 같기도 하고 중증의 천식환자 같기도 하여 그놈들은 잘라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끼리의 경쟁이 아니라 생사를 위협하는 무자비한 공격을 당한 나무들을 발견했다. 밤.도토리 나무였다. 그 밤 도토리 몇 알을 줍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밑등을 마구 두들겨 맞아 생살이 떨어져 나간 채 아무런 저항도 못함을 항변이라도 하듯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에게나 소유 본능은 있지만 지나치면 탐욕이 되고 그 정도(正道)를 넘으면 천박스러워지기도 한다. 아직도 다람쥐 양식을 먹어야 할 만큼인지는 모르지만 나무야 죽든 말든 그 알량한 밤.도토리 몇 알과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아직도 생채기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인 듯 피인 듯한데 말이다.
눈앞의 조그만 이익에 몰입하기 보다는 그래도 좀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초목도 생명이어서 감정도 있다고 한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자란다고도 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우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삼림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나무가 죽으면 밤 뭣도 다 없어지고 만다. 절해고도에 표류해온 인간이 뒷날은 생각 않고 나무를 남벌하다 나무와 운명을 같이 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밤나무와 참나무는 개체수가 많아 그렇다 치더라도, 희귀하고 번식력도 약하여 법으로 보호하는 식물이나 야생의 조수 등이 격감해간다는 현실 앞에서는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환경운동가들은 몇몇 종은 이미 멸종됐다고 하고, 오래지 않아서는 지구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춰 도록에서나 남을 종이 늘어날 것이라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몸에 좋다는 뱀, 개구리의 마구잡이는 안톤 슈낙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뜻있는 사람들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비웃듯 남획을 자행하는 그들이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
초목뿐만 아니다. 물 바다 바위 등도 생명 있는 자원이다. 돌돌 노래하며 흐르는 개울물, 즐거움 주는 솔바람 한 점, ‘큰바위 얼굴’에 비유되는 거대 돌덩이 등도 분명 생명 있는 자원이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온 삼라만상 생성의 모태가 모두 자연이니 인간만이 자연을 향유하고 혹사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공존 공생해야 형평에 맞다. 생물다양성이 곧 자연의 섭리이다.
공존, 그리고 공생! 어! 그리고 보니 이게 아닌데…! 살기 위해 나무를 기어오른다고 잘라낸 그 담쟁이덩굴도 살아야 하는데, 살아가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데 이를 어쩌나? 옥죄인 나무를 다시 살폈다. 얼핏 보면 숙주의 영양분을 탈취하는 것같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그저 나무껍질에 단단히 흡착만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런 식물을 전요(纏繞)식물이라 하는데 담쟁이 덩굴뿐만 아니라 인동초, 등나무, 칡 등 무수히 많다고 한다.
이에 비해 꼭 높은 나무 꼭대기 가지에 뿌리를 내려 숙주의 영양분을 탈취하며 살아가는 겨우살이(寄生木) 식물이 건강에 좋다고 하여 고산을 찾아다니는 전문 채취자도 있다니 이도 공존.공생으로 봐야 할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숙주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그걸 잘라버린 내 단견, 섣불리 생태계의 교란종이라 단정한 내 짧은 사유(思惟)의 세계만 드러나고 말았다. 이 지구상 현생 생물종들은 왜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을 피할 수는 없는지, 최근엔 학문에서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통섭(通涉)과 융합(融合)이라는 이름으로 그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니 이 또한 내 사유의 흠만 드러내는 것 같아 여기서 그만 접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