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말을 만들고 말은 시대를 만든다고 하더니 이 지음은 ‘갑과 을’이 단연 시대적 화두이다.
이도 모자라 ‘슈퍼 갑’도 나왔고 갑의 횡포를 꼬집는 ‘○○갑질’이라는 저급한 표현도 나왔다. 이들 화두가 나온 지는 이 지음이지만 연예계의 노예, 편의점업계의 노예, 먹이사슬 등의 극명하게 갈리는 어법이 나온 지는 한참 됐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관계를 가지며 사는 이 사회, 갑 아니면 을이다.
강자 아니면 약자이다. 이는 생래적이고 구조적이어서 인위적으로 제어하기란 불가능이다.
지금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갑과 을의 사전적 의미는 주체와 종속의 의미이다. 주택 임대차에서 주택임대차보호법이라는 장치는 있어도 그래도 임대인은 갑이고 임차인은 을이다.
기업의 경영자는 갑이고 노동자는 누가 뭐래도 을이다. 보호법이 있고 노조법이 있어도 을은 을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어떻게 하겠는가?
뿐만이 아니다. 토건.건설사업 현장에서 원청업체는 하청업체를 부르고 이 하청업체는 또 하청업체를 부르니 ‘하하청업체’가 된다고 한다. 이럴 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자명하지 않는가?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난 금수도 우열이 있고 강자와 약자가 있다. 강자는 어미 젖꼭지를 독점하고 약하게 태어난 놈은 포유도 제대로 못한다.
어떤 맹금류는 여럿 새끼 중에서 강한 놈만 키우고 약한 놈은 스스로 도태되도록 방치한다는 얘기도 있다. 이걸 어떻게 하겠는가?
누구나 ‘자기 가치’를 제 역량껏 누릴 수 있어야 평등 사회라고 포괄적으로 말하고 이게 실현되지 않으면 불평등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불평등 사회를 어떻게 바로 잡을까. 이를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있다. 상식선에 입각한 도덕률이 있고 이도 안 되면 규칙을 정한다. 다층적 이 사회 갑.을이 엄존하는데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프랜차이즈의 본점과 가맹점 사이의 불균형은 또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지금 이 나라 한 정당은 약자인 을을 지키겠다며 ‘을지로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민 앞에서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표 앞에서는 낮은 자세이지만 국정감사장에서는 갑으로 돌변한다.
그것도 국민을 위하고 국민의 대변자이니 국민의 편에 서야 하니까 국민이 갑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앞서 이 사회 모두 갑과 을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듯 이 프레임에 자유로운 사람도 영역도 없다.
특히 중소상인의 목줄을 죄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장악으로 촉발된 갑.을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여론의 뭇매를 맞더니 일단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또 언제 잠재돼 있는 강력한 그 힘이 어디로 분출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힘의 논리는 그야말로 ‘밀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강제력을 발휘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법 제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법 제정도 따지고 보면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해가 첨예하게 걸린 계층이나 집단이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직의 힘을 빌리거나 ‘로비’를 하거나 공공의 이익은 뒤로하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힘겨루기를 한다. 오래 전 의약분업 제도를 도입할 당시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약 처방할 때 상품명으로 하느냐 성분명으로 하느냐를 두고 의사와 약사 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상품명으로 하면 약사가 불이익, 성분명으로 하면 의사의 선택범위가 좁아진다고 하여 치열하게 대립했다. 결국 사회 통념상 비교 우위가 되는 의사의 ‘상품명’이 판정승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약사에게도 일부 재량권은 있었다. 상품명대로 처방해야 하지만 성분이 같으면 처방과 다른 상품을 조제(대체 조제)할 수도 있지만 의사가 ’대체 불가‘라고 못 박으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땐 의사가 약사의 갑 중의 갑, 이른바 ’슈퍼 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절묘한 포인트(?)가 있다는 사실에 당사자인 약사는 낙담할까, 아니면 전의(戰意)를 품을까.
이거야말로 갑과 을이 형성되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논쟁은 오래 전에도 있었다.
한약 조제권을 두고 한의사와 약사 간에 업계의 사활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인 것이다.
갑과 을의 상생, 참으로 어렵다. 이런 사이에 낀 제약회사만 죽어나는 것이다. 처방의 전권을 가진 의사가 제품 불매운동(처방 안 하기)에 나선다는 것이니 을의 입장인 약사나 제약회사는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불과 얼마 전에도 있었다. 이른바 ‘리베이트’ 문제가 불거져 여론이 악화되니 실상이야 어찌 됐든 의사들이 분풀이를 하듯 불매운동으로 표출한 것이다.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를 마구 휘두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의사와 약사, 그야말로 보완.상생이어야 하는데 이 두 집단의 이기주의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다.
환자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앞서 지적했듯 갑과 을은 모든 영역, 모든 인간관계에서 엄존하고 있다.
다만, 그 구분이 모호할 때도 있지만 획일적으로 말한다면 강자와 약자 사이라고 정의하면 정확하리라.
이 다층적 인간관계에서 갑이 을이 될 수도 있고 을이 갑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이다. 수평적 관계일 수만은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이니 때로는 수직적 질서도 필요할 때가 있는, 이른바 논리모순(論理矛盾)에 빠지기도 한다.
참으로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인간사! 도식적(圖式的)으로 뭐라 한마디로는 설명할 길이 도저히 내게는 없다.
나의 얕은 식견으로 풀기는 어림도 없는 무거운 주제임에는 틀림없다.
어떤 법이, 어떤 사회제도가, 어떤 형태로 나와도 이 갑과 을의 경계가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이 하나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자리매김하면 어떨까? 참으로 어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