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눈물이 났다. 스스러운 마음에 슬쩍 곁눈질을 해 보니 옆자리의 아내와 그 너머 아들아이의 눈에서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이었지만 반짝이는 이슬방울이 선명했다. 영화 ‘실미도’가 상영되고 있던 극장 안에서였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꽃다운 나이에 한 송이 동백꽃처럼 후두두 꺾여 버린 영화 속 훈련병들의 삶이 가여워서 울었고, 또 한 번은 그들의 억울한 죽음도 헛되이 서로 제 몫 챙기기에만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이른바 이 나라 지도층 인사들의 꼴불견이 서글퍼서 울었다.
  훈련병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역사의 희생양이 되고 만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영화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백주에 인파로 붐비는 서울 바닥 한복판 큰길에서 수류탄 자폭으로 생을 마감한 사연이 너무 애절하고 안타까웠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며 죽어 갔을까. 그들에게도 응당 사랑하던 부모 형제며 허물없던 벗이며 잊지 못할 고향 산천이 있었으리라. 그 따스한 품에 안기는 꿈을 꾸며 차마 눈을 감지 못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를 원망하랴,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만 것을……. 
  남과 북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던 ’60년대 후반, 우리는 느닷없이 북한군 무장 공비들에 의한 청와대 피습이란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을 당한다. 이름하여 1․21사태이다. 당시 최고 권력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핏발선 앙갚음을 다짐하게 되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군대가 바로 ‘684 실미도 부대’였다고 한다. 
  실미도失尾島는 천연의 요새지인 모양이다. 거기 외딴 무인도에서의 삼 년여에 걸친 혹독한 지옥 훈련, 땅바닥에 닿을락 말락 하게 쳐진 철조망 아래로 진흙탕을 구르고, 아무런 구호장비 없이 맨몸으로 바닷속을 잠수하고, 보기에도 아찔한 낭떠러지를 가로지르는 외줄을 타고……. 등 뒤에서는 포탄이 소나기 퍼붓듯 쏟아지는데,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인간이 극한상황에 이르면 무엇이든 못 해낼 게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철저히 단련된 인간 병기였다. 여차하면 터져 버릴 시한폭탄이었다. 
  운명이었을까. 그 후 상황이 반전되어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들의 피눈물 나는 그간의 고생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들의 용도는 하루아침에 폐기처분의 운명에 놓여졌고, 그들은 조용히 처리되어야 할 골칫거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필요에 의해 부림 당하다가 그 필요성이 다해지자 없어져 주어야만 했던 토사구팽의 희생물, 이것이 그들 앞에 부여된 생의 마지막 임무였다.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전원 사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부대장 앞으로.              
  이러한 첩보가 훈련병들의 귀에 흘러 들어갔고, 그들은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마침내 거사擧事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아군끼리 총부리를 겨눈, 운명의 날 꼭두새벽의 대혈전이었다. 물론 애꿎은 기간병들의 희생도 억울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생각해 보라, ‘내 자신이 이 비극적인 역사의 주인공이었다면’ 하고. 선택의 길은 그리 많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다만 나라의 부름에 충실했었다는 것, 그것뿐이리라. 
  그들의 극적인 죽음을 보면서 불현듯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호국의 영령들이 떠오른 것은 어인 까닭일까.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초개草芥처럼 목숨을 던진 순국선열과 호국 용사들, 님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바치셨다. 
  이 두 죽음을 놓고 물론 차별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구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죽음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억울한 죽음이었다면, 또 한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떳떳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설사 그렇긴 할지라도 조국의 부름에 응한 그 순수했던 정신만은, 그리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목숨 바쳤다는 그 사실만은 결국 마찬가지 아닐까.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다. 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 아깝지 않은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있으랴. 그 소중한 가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한평생 일신의 영달과 안락을 위해 발버둥 쳐서 마침내 마르고 닳도록 살아남은 삶과, 대의大義를 위해 기꺼이 헌신함으로써 꽃다운 나이에 져 버린 삶, 이 구분은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대명제에 대한 말 없는 해답을 던진다. 어느 쪽에다 무게 중심을 둘 것인가는 각자에게 주어진 판단의 몫이다. 
  만일 누군가 내게 이 문제에 관하여 물음을 던져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의 삶에다 굵고 진한 동그라미를 질러 동의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나라 위해 산화하신 님들은 순간을 죽음으로써 영원을 사는 길을 택한 거룩한 분들이다. 호국의 성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말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일인가. 누구 없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임에랴. 그러기에 여기에는 죽음 앞에서 의연한, 비수 같은 용기가 앞서야 하리라. 일신의 안락을 구하며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금세 흔적조차 인멸湮滅해 버렸지만, 대의를 위해 고귀한 목숨 바친 분들은 역사 가운데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역사가 확실한 증인이다. 
  해마다 유월이 다가오면, 우리가 평소 호국의 영령들에게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권세에 아부하면서 일신의 안락을 챙겼던 이들과 그 후손들은 잘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반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분연히 던진 분들의 유족이나 그 후손들의 삶은 하루하루 끼니 잇기도 힘겨운 딱한 형편에 놓여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부끄러운 현주소이다. 사마천의 탄식처럼, 정녕 천도天道란 이 길밖에 없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든 때가 되면 가야 한다. 기나긴 세월의 강물 가운데서 이승에 머무는 기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이다. 이 수유에 불과한 삶을 걸레처럼 더럽히면서까지 일신의 안락을 꾀하며 벼륵박에다 똥 칠갑을 하도록 살아남은들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금동 김동인金東仁이 친일 행각을 한 춘원春園에게 훗날 스스로 자결할 것을 촉탁했을 때, 춘원은 제 한 몸의 영화를 챙기는 데만 눈이 어두워 금동의 충고를 끝내 거부했다. 그 결과, 춘원은 가고 없어도 그가 생전에 남긴 친일의 행각은 이 역사 끝나지 아니하는 한 부끄럽고 추한 이력으로 길이길이 곁을 따라다니며 그의 화려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그가 만약 그때 금동의 말에 따랐더라면 오늘날 춘원에 대한 평가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살 일인가?’ 하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더없이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있으리라.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대한의 아들로서 해마다 유월로 접어들면 가슴 한 켠이 아리어 온다. 나라가 처한 존망의 위태로움 앞에 분연히 자신의 몸을 던지고서 꽃답게 산화해 간 호국의 영령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제각기 주어진 일상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롯한 자존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님들의 나라 사랑의 위업을 길이길이 기리고, 그 후손들에게 정신적으로라도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위안이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님들로부터 오늘의 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빚지고 사는 우리들 모두의 임무요 자세가 아닐까 한다.
  엔딩 신이 흐르고 객석에 불이 들어와도 나는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 일어서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