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옛말에 어정칠월 둥둥팔월 이라더니, 퇴직 후 두 돌이 다되어 간다.
거꾸로 메달아도 가는 것이 세월이라 했던가.
한 달차로 먼저 가는 양력이 동생인 음력에게, 아우야 청산가자!/ 머루랑 다래랑 따먹고 청산가자/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전문>
 
작년 말에 지인의 소개로 ‘대구문지회’에 가입하여 꼭 칠삭둥이가 된 나는 처음으로 문화답사 기행에 동참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어린시절 소풍가는 전날 밤이면 마음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초립동의 추억 마냥, 온 밤을 궁싯거리며 뜬 눈으로 보냈다. 이른 새벽, 식은 밥에 물 말아 허기를 겨우 면하고 헐레벌떡 관광차에 몸을 실었다. 마침 지인의 도움으로 뒷좌석이지만, 비워 둔 자리가 있었다. 금상첨화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옆 좌석에 예쁜 여친 까지 배려한 지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우째 이런 일이? 오래 살다보니 내 사주에도 없는 여복(?)까지 덩굴채로 굴러 들어오다니…! 주여! 뜻대로 하소서!
 
1호차에 탑승한 인원은 37명, 거의 선배회원님 들이었다. 햇병아리 회원인 나는, 주는 떡에 음료수까지 얻어먹고, 이종원 회장님의 자상하신 안내에 귀를 기우렸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고, 어느 골목 해설사님의 오랜 경륜에서 묻어나는 원숙한 해설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는 추억이 가장 많은 자’라고 수필가 피천득님은 말하지 않았던가.
이종원 회장님의 ‘범망경(梵網經)’에 나오는 여덟 가지 복전과 ‘참된 인생’이란 좋은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새겨들을만한 내용이었다. 특히, ‘악(惡)을 보거든 뱀을 본 듯 피하고, 선(善)을 보거든 꽃을 본 듯 반겨라’는 구절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茶山)생가였다. 본래 위치는 다산 유적지 주차장 부근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소실되었던 것을 유적지내 이 곳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살던 집은 ‘여유당(與猶堂)’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고, 사랑채와 안채로 지어진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한옥이었다. 부근의 유적지 박물관에는 선생이 남긴 글과 작품들이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산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어진 선비요, 청렴한 목민관이었으며, 실학자이신 선생은 모든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선생이 남긴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는 18년간 오랜 청빈낙도의 유배생활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라 하니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약 선생이 고위관직에서 호위호식하며 살았다면 이러한 불후의 명작이 과연 탄생하였을까.
 
다산 유적지를 뒤로하고 두 번째 들린 곳은 양수리(兩水里), 즉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두 물머리’였다.
옛날에는 말의 죽을 먹였던 곳으로 ‘말죽거리’라고도 한단다. 두 물머리에는 그 유명한 ‘세미원(洗美苑)’이 있다. 삼각지 늪지대에는 연꽃단지를 만들어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觀花美心)’는 말이 있듯이 물과 꽃의 정원이란 세미원은 자연과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산교육의 장(場)이었다.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갈대밭과 연꽃단지는 과연 장관이었다.
뜬금없이 ‘불이의 노래’라는 민병도님의 시가 생각난다.

그리움은 그리워서 가슴에 묻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워서 영혼에 묻고,
거룩한 나의 그대는 그대 안에 두었네!

연꽃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은 꿀맛 같았고, 포항에서 사업하시는 여 회원님(?)의 막걸리 찬조는 한층 살맛나는 세상에 와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운치와 여흥에 취해 그런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다음에 들린 곳이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용문산 용문사였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대웅전 외에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미륵불상 등 지방문화재의 보고(寶膏)였으며 특히, 보물 제531호인 정지국사(正智國師) 비(碑)와 부도(訃悼)가 봉안되어 있었다.
또 지방유형문화재 172호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천년은행나무가 있었다. 수령은 1,200년, 나무둘레 14m, 높이 42m로 동양에서 제일 큰 은행나무란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禍)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하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조선 세종 때는 정3품보다 더 높은 당산직첩(堂上職牒)을 하사 받은 명목(名木)으로 유명하다.
 
천년은행나무를 뒤로하고, 하산 길에 정기범 해설사의 구수한 이야기로 우정을 다진 것이 오늘의 큰 수확으로 여겨진다. 사람은 반드시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만나는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의 법칙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어제의 홍안 소년이 이마에 인생계급장을 달고 등 굽은 노인으로 변모해 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법, 사바세계에 나와서 그늘과 빛을 따라 울고 웃으며 뒹굴다 황혼녘엔 이슬같이 사라지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나도 머지않아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조금은 서글프고 착잡하지만 숙명인 걸 어쩌랴. 3%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 여생을 사회에 봉사하며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흘러간 옛 노래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가슴 뿌듯한 그 무엇을 느꼈으며, 특히 박지구 감 사님의 섬김의 리더십 또한 우리 일행을 감동시킨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