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주년을 맞아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6.25 사변은 ‘북침’이 라고 대답이 70% 이상으로 나왔다. 자그마한 충격이다. 처음에는 이른바 좌편향 교육의 결과가 아닐까하여 큰 우려를 하기도 했으나 다행이도 다시 조사를 했더니 ‘북한이 한 침략’을 북침이라고 했고 ‘남한이 한 침략’을 남침이라고 했다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인은 한자교육 부재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한자어가 우리 일상어 어휘의 70%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오랫동안 벌이다 결국 공문서만 한글 전용 정책으로 귀결됐다.
그러다 한글 전용으로는 우리말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고 하여 온용 정책이 힘을 받아 중고교 교과서에서 만이라도 상용한자 1800자를 가르쳐야 한다며 다시 교육 정책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지금도 치열하다.
한국교육평가원이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 한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연구보고서를 교육부에 낸 것을 본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외솔회 등 한글전용 논잘을은 “첨단과학 한글 시대의 주역이 돼야 할 어린이들에게 한자의 멍에를 다시 씌우려고 책동하는 반민족 반역사적 행위”라는 성명을 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안타깝다 못해, 한자 교육에 왜 ‘반민족.반역사’를 언급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더욱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뜻글자를 가르치면 ‘사대모화(事大慕華)…’운운에는 할 말을 잃는다. 그렇다면 영어를 배우는 것은 또 뭐라 할 것인가.
영어를 채 배우지 못한 노년들이 베이비부머, 하우스푸어 등의 일상어가 우리말화 되어가는, 변화하는 어문환경(외래어 홍수)에 대처해 가듯, 한자에 약한 세대들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배우며 적응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또 한문 투의 어휘가 많은 우리 어문을 한자를 배제하고는 어문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최소한 토를 달거나 한자 병기를 해야 한다. 우선 우리 학술용어, 의학용어, 문학고전 등은 선인들이 썼던 한문 투의 글이라도 어원을 알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를 한글로만 적는 것도 그렇지만 아예 기피하여 사어(死語)가 되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김치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이때, 그 어원은 한자어 저(菹)와 고어 딤채(沈菜.침채)에서 찾는데 이럴 때 한자를 쓰지 않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저명인사들의 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수필가 피천득(皮千得)의 호가 ‘거문고 타는 아이’라는 뜻의 ‘금아(琴兒)’인데 그냥 금아라고 쓰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주입식, 암기식으로만 익혀야 되니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나라 국문학사를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최조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을 드는데 그는 미식가로도 유명했다고도 한다. 그의 작품에 도문대작(屠門大爵)이 있다고 하면 한글로만 방속 자막을 내보냈으니 이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지금 한자 한 자도 쓰지 않는 신문을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가장 쉬운 예로 ‘선행학습’이라고 적으니 처음 접하는 사람은 ‘先行’인지 ‘善行’인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80%가 넘는 동음이의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의학 서적만 해도 한자가 없으면 존립 근거도 없다.
한 원로 의사는 젊은 의사들이 ‘진통(鎭痛)과 진통(陣痛)을 혼용한다’고 개탄했으니 이게 바로 한자교육 부재가 부른 결과이다.
금년부터는 초등학교도 개정된 교육과정에 다라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고, 최근에는 한.중.일의 공통상용한자 800자가 발표됐는데 앞서 언급한 한글 전용자들의 혼용 반대 논지가 또 어떻게 변화할까 궁금해진다.
하늬바람(서풍) 등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이 왜 없을까만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면서 쉽고 풍요로운 어문생활을 해야 한다는, 상호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글의 논지이다.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친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국어사전’을 ‘말모이’로, ‘조선어강승원’을 ‘한글배곧’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선생 이름 주시경을 ‘두루때날’이라거나 ‘두루때글’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전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느 대학교 이름도 순 우리말로 ‘배꽃계집큰배움커’라 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한다.
언감생심 선생의 위대한 업적에 추호도 흠을 내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 글을 접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