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농부였다. 그 사실이 나를 못마땅하게 만들었다. 왜 다른 아버지들처럼 깔끔한 양복 차림에다 반들반들 머릿기름 바르고 서류 가방을 들지 않았는지,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도시의 아버지들이 하는 출근과 퇴근이란 것이 따로 없었던 아버지, 친구와 함께 뒷골목을 걸어 나오다 똥장군을 지고 오는 자기 아버지와 마주치자 길을 잘못 들었다며 되돌아서 도망치듯 줄행랑을 놓았다는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에 생각이 미친다. 
정말이지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심정이 영락없이 그랬다. 누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어 오기라도 하면, 우물쭈물 대답을 얼버무렸다. 흙과 더불어 사는 삶이란 게 워낙에 말쑥함하고는 거리가 먼 일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차림새는 늘 세련되지 못하고 후줄근했었다. 그것이 어린 마음에 참 창피하게 여겨졌던 게다. 그때는 그렇게나 철이 없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고 하던 어느 잡지의 표제에서처럼, 나도 이제는 당당히 밝힐 수 있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였다고. 땅만 파먹고 살아 온 정직한 농사꾼이었다고. 
그런 아버지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돈 잘 버는, 도시의 아버지를 두었던 아이들이 더 이상 부럽지 않다. 가뭄에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닮은 아버지의 투박했던 손, 깔끔하게 차려입고 회전의자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도시 아버지의 곱상한 손보다 그 못생겼던 손이 마냥 자랑스럽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이 지금처럼 야멸스러운 때가 있었던가.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로는 살아남기 힘든 각박한 세상이 되었다. 순박하고 여린 마음으로 헤쳐나가기에는 오늘의 세파가 너무 사납고 거칠다. 이 혼돈의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삶의 전장戰場에 나선 우리의 아버지들로 해금 정직하지 못함에 길들여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어디 하는 일에 귀천이야 있을까마는, 그래도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이 있다면 이렇게 부정직을 강요당하며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도시의 아버지들과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아닐까. 
땅은 정직하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인 수학 공식처럼. 사람은 땅을 속일지 몰라도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의 원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곳이 바로 이 땅이다. 성정은 게으르면서 수확에만 욕심을 부려 금비를 잔뜩 뿌리면 틀림없이 병충해가 찾아든다고 들었다. 지력을 높이려고 오뉴월 뙤약볕과 싸워 가며 퇴비를 듬뿍 낸 논밭의 곡식은 농부가 흘린 구슬땀에 값진 보답을 하리라. 이것이 땅에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 없는 가르침이다. 
농사가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한 옛사람들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씨 뿌리고 가꾸어 열매 맺는 과정을 보는 것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신성한 노동이 아닌가. 지금 나는 아버지가 농부였음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농부였던 그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이제 나도 어떤 것이 참된 아름다움인지 분간해 낼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왜 깊게 파인 이마의 주름에다 구레나룻 성성한 늙은 농부가 예술의 대상이 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보기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도 비로소 깨달아진다. 몸에다 치렁치렁 요란스런 장식을 달고 다니며 겉멋을 부려대는 것이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 줄을 이제야 알겠다. 아무런 꾸밈이 없는 풀꽃들에서 진정 고운 향기가 풍겨 나온다. 그러기에 이 수수한 풀꽃들의 모습이, 요염한 장미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보기 좋은 것이 보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이라면, 아름다운 것은 보다 심층적이고 정의적이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인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것을, 깊을수록 더욱 맑아진다고 바꾸어 놓아도 그리 틀리지는 않으리라. 
육식을 자꾸 하게 되면 성질이 난폭해지고 초식을 많이 하게 되면 성격이 온순해지듯, 도회의 시멘트벽에 갇혀 살다 보면 저절로 차가운 시멘트의 속성을 닮게 되고, 시골의 흙과 더불어 지내다 보면 자연 순후한 흙의 성정에 동화되어 가리라. 아스팔트는 나무 한 그루 키워내지 못한다. 시멘트 바닥에는 풀 한 포기 돋아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아스팔트나 시멘트 바닥은 깔끔하기는 할지언정 거기에다 아름답다는 이름이 붙여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땅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명줄을 붙들어 주고, 마지막으로 돌아가 육신을 누일 최후의 귀의처가 아니냐. 가장 성실하고 믿음직한 보호자가 아니냐. 이것이 내가, 한평생 흙과 벗하며 묵묵히 가정을 건사해 오신 아버지의 삶에 뜨겁게 박수를 보내고픈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