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났다. 이제 한낮의 열기도 한결 수굿해진 듯하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들바람이, 여름내 불쾌지수를 끌어올리던 살갗의 끈적거림을 거두어 간다. 
창밖의 그림이 하루가 다르게 짙은 초록에서 연한 황금빛으로 갈아드는 중이다. 
그 정경에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아, 가을이구나!” 하는 영추송迎秋頌이 나직이 입가에 머문다. 
이런 시절이면 또 하나의 은밀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다투어 담장을 타고 오르며 키 재기를 하는 호박꽃의 모습이다. 
황금빛 나팔을 닮은 송이 송이들이 시샘하듯 꽃등을 켜 들고서 벌, 나비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종족을 퍼뜨릴 시간적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인가 보다. 
설사 눈여겨 살피는 이 하나 없을지라도 자기만의 빛깔로 부지런히 생의 끝자락을 장식하려는 호박꽃, 누가 알아주건 말건 자신에게 허여된 삶에 온 힘을 쏟는다는 그 뜨거운 열정 앞에서 마음속 깊숙이 잔잔한 떨림이 전해져 온다. 누군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모멸감을 안긴대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호박꽃을 보고 있으면, 코흘리개 시절 시골 학교의 여자 동기생들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런 꾸밈짓도, 속임수도 몰랐던 단발머리 계집아이들은 하나같이 호박꽃을 닮아 있었다. 
장미처럼 요염하거나 프리지어처럼 세련되지 못해서 오히려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꽃, 그 수수하고 순박함이 바로 호박꽃이 지닌 미덕인가 한다.
무릇 사람은, 인물이 잘나면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심적인 피해를 입히게 돼 있다. 잘난 이의 무의식중의 거들먹거림이 못난 이들의 가슴에 무수한 상처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밀린다왕문경』말씀에 따르면 모르고 저지른 죄가 알고 저지른 죄보다 더욱 크다고 했다. 그 가르침대로라면, 금생今生에서 잘난 이는 모르고 지은 업으로 해 다음 생에서는 틀림없이 못난이로 환생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못난이는 주위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안의 대상이 된다. 필부는 못난이로 해서 스스로를 위로받는다.
까닭에 잘난 이들끼리는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 배척을 하지만, 못난이들끼리는 전류처럼 쉽사리 마음이 통한다. 이를테면 동병상련의 심사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닐 터이지만, 얼굴 생김생김이 조금 반반하다 싶으면 대체로 성격이 모가 나는 수가 많다. 
어릴 적부터, 과녁판에 꽂히는 화살처럼 집중되는 예쁘다, 섹시하다 하는 추어올림이 잘난 이의 콧대를 세 치만큼 높여 놓는 까닭이다. 
콧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콧대 높기로야 역사상 클레오파트라만 한 여인이 또 있을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바뀌어졌을 것이다” 
철학자 파스칼이 사백 년 전에 남긴 이 명언이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음을 보면, 그녀의 코가 얼마나 높았었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꼭 코 자체가 높아서만 그 말이 그처럼 긴 생명을 지녀 왔을 것인가. 그것은 아마 바늘 끝 같은 자존심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닐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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