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시절을 어김없이 다시 오월로 데려다 놓았다. 
온 산에다 강냉이 튀밥을 흩뿌린 듯 아카시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면, 뭉게뭉게 꽃구름을 일으키는 그 순백의 향연에 넋을 빼앗길 지경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찬사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정녕 오월은 축복 받은 계절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 화사한 모습이, 산책객의 발걸음을 자연스레 꽃 대궐로 꾸며진 아카시아 숲으로 이끈다. 
초입으로 들어서는 순간, 푸성귀를 씹듯 상큼한 청량감이 도시 생활의 자동차 그을음으로 찌든 폐부를 설렁설렁 헹궈 준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기분도 잠시, 이내 눈동자 개개풀린 백치 미인과 빤히 얼굴을 마주하고 선 것 같은 답답함에 적잖이 실망하고 만다.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되 도무지 향기가 풍겨나지 아니하는 숲, 적막 같은 정적 가운데 화려한 죽음의 냄새만이 벌벌벌벌 감돈다. 
미풍에 산들거리는 가느다란 움직임마저 감지되지 않는다면 조화造花라고 착각이 들 지경이다. 자연 벌 나비들이 모여들 리가 없다. 그 지천이던 벌과 나비들은 대체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누구는 이것을 환경오염이 빚은 생태계의 교란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 일견 일리가 있는 성도 싶다. 생존 환경이 나빠지다 보니, 그런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향기마저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꽃들의 자기 보호 본능이 작용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아, 이제 저 말 못 하는 식물들조차도……. 환경오염이, 지각知覺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초목에까지 영향을 미쳐,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마저 앗아간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언뜻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다. 시대착오적인 말일는지는 모르겠으되, 향기를 잃어버린 이 아카시아꽃이야말로 바로 오늘을 사는 여인네들을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예부터 여성을 두고 노류장화路柳墻花니 화용월태花容月態니 직장의 꽃이니 꽃뱀이니 하고 흔히들 꽃에다 빗대어 왔으니,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리라. 
아름다운 향기를 좇아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한 조화주의 이치일 터이다. 그런가 하면, 달콤한 꿀단지에 벌이 모여들듯 암컷이 페로몬 향을 풍기면 수컷들이 다투어 꾀어들게 마련이다. 이러한 대자연의 이치가 인간에겐들 다를 리 있으랴. 풋풋한 청춘남녀의 어우러짐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한다.
세상이 바뀌면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는 시대가 됐다. 이를 남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끌림의 상실이다. 향기 없는 꽃에 벌들이 모여들 리 있을 것인가. 마음의 향기를 잃은 여성에게 남성들이 접근하려 들지를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일 터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에 여성들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눌려 지내던 지난날의 분위기는 이제 화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오히려 우악스럽고 드센 여자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고개 숙인 남자들이, 불경기의 인력시장 잡역부들처럼 늘어 가는 시대이다. 
삶터를 옮길 때 버리고 떠날까 봐 이삿짐 차의 화물칸에 강아지를 껴안고 맨 먼저 냉큼 올라앉는다거나, 아내가 곰국을 끓이면 또 며칠을 홀아비 신세 될까 봐 두려워 떤다는 우스개가 한낱 우스개만은 아닐 것 같다. 하루 한 끼도 집에서 안 먹어 아내를 편하게 해 주는 남편은 ‘영식님’, 한 끼만 먹는 남편은 ‘일식 씨’, 두 끼를 먹는 남편은 ‘이식 군’,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어 아내를 귀찮게 만드는 구들목 지킴이 처지인 남편은 ‘삼식 새끼’라고 부른다나 어쩐다나. 어느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는 모르겠으되, 요즈음의 세태를 참으로 그럴싸하게 꼬집어 놓았구나 싶은 생각에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아니, 웃음이 나오기는커녕 차라리 비애감마저 든다. 까딱하다 밉보여 버림받으면 어쩌나 싶어 납작 엎드린 채 눈치만 살피는 기죽은 사내들이 많아져 갈수록, 꽃은 저 혼자 피었다 지는 연습만을 되풀이할 것이다. 
꽃은 열매 맺음이란 과정이 뒤따라야 진정 아름다운 법이리라.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을 두고 과연 꽃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꽃 없이도 열매를 맺는 무화과無花果와는 달리, 꽃만 피웠다 열매도 맺지 못하고 지고 마는 꽃답지 못한 꽃, 이를 일러 나는 ‘무과화無果花’라고 부르련다. 
요사이 들어 지나친 저출산율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가임기의 여성들이 너도나도 아이 낳기를 꺼려서 빚어진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 음기가 드세어져 양기가 기를 펴지 못하는 이즈음의 분위기도 한몫을 거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괜스러운 노파심이 든다. 세상의 하 많은 여인들이 이러다가 무과화로 생을 마치고 마는 것은 아닐는지……. 흐드러진 아카시아꽃 사이로 잔칫집처럼 벌 나비들이 윙윙거리던 건강한 풍경은 이제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돼 버린 것일까. 
숲을 뒤로하고 찻길로 나선다. 매연 냄새가 훅 코를 자극해 온다. 삶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