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구했을까, 아내가 운두 높직한 화분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시장 본다면서 일찌감치 저녁술을 놓고 나가더니, 장거리는 없고 손에 들린 것이라곤 달랑 이 화분이 전부다.
“웬 화분이지?” 
의아쩍어하는 나의 물음에, 거기다가 콩나물을 한번 길러 볼 생각이라는 대답이다. 화분을 콩나물시루로? 그것참 별스러운 아이디어구나 싶다. 하기야 깨어진 기왓장이나 옹기 조각에다 야생화를 키워 놓으니 꽃꽂이작품처럼 얼마나 색다른 운치가 있어 보이던가.
아내는 밑바닥에 어레미를 깔고는 그 위에다 미리 불려 놓은 콩을 안쳤다. 그런 다음 검정색 옥양목 보를 덮어씌워서는 발을 걸친 받침 그릇 위에다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얹는다.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나가는 손길이 전에 없이 진지하다. 그래 놓고는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간 시간마다 물을 준다. 그 일련의 움직임으로 보아 내심 기분이 흡족한 모양이다. 콩나물시루 앞에 앉은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으려니, 콩나물 기르기를 즐겨 하시던 생전의 어머니 영상이 겹쳐 보인다. 당신 살아 계실 때는 고부간 갈등으로 적잖이 마음고생을 한 아내였건만, 세월이 사람을 닮아가게 만드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콩나물 기르는 모습을 본 지도 언덕 너머처럼 까마득하다. 요즈음에야 편리를 좇아 내남없이 사다 먹는 세상 아닌가. 내처 시장을 애용하다 가로늦게 웬 호들갑인가 싶어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 
“우리 집 형편이 언제 콩나물값 한 푼이 아쉬울 만큼 어려워졌던가?” 
은근슬쩍 농을 치는 내게,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이 있다는 둥 보다 환경친화적이라는 둥 어쩌고저쩌고하며 수다를 떤다. 해간 그런 아내의 모습이 그다지 밉살스럽지가 않다. 
당초엔 껍질이 여물기가 차돌 같았기에, 비록 불리긴 하였어도 내심 언제 싹이 트려나, 조바심이 났다. 그랬는데 글쎄 그게 아니었다. 물을 끼얹는 족족 주르르 죄다 빠져 버리는데도, 이틀이 지나자 발이 생기더니 사흘째 되면서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키를 키워 가는 것이다. 음표를 닮은 고 귀여운 생명체들의 모습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해서, 나도 슬쩍슬쩍 아내의 눈을 피해 가며 물을 줘 보곤 했다. 
그런 어느 아침이었다. 중학생 딸아이가 콩나물시루 돌보고 있는 제 엄마의 등 뒤에 찰싹 붙어서는 애교 띤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꼭 미루나무 둥치에 매달린 매미 같다. 막내 특유의 어리광이 사랑스럽다. 여느 때와 다른 살가운 태도로 보아 또 용돈이 궁해진 모양이다.
“너희들은 어째 만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고?”
예의 그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의 입에서 녹음기처럼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엄만, 콩나물만 자라는 줄 알아.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만큼 자랐잖아.”
아이의 일격에 케이오 펀치를 얻어맞은 아내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중학생 입에서 이런 공자님 말씀 같은 이야기가 튀어나오다니……. 늘 어린애인 줄로만 여겼었는데, 아이의 생각주머니가 언제 그렇게 커져 있었던가 싶다. 
어쩌다 친지가 집에 찾아오면, 그분들이 덕담 삼아 건네던 말이 생각난다. 
“아이구나, 얘들이 어느새 이렇게 컸지? 한결 의젓해졌네.”
알고 보니 그게 그저 듣기 좋으라고 인사치레로 한 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꾸로, 우리가 지인의 댁을 방문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집 아이들의 몰라보게 성장한 모습에 놀라곤 한다. 오뉴월 한나절 볕이 무섭다더니, 매일같이 가까이서 두고 보면 실감을 못 해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것이 아이들 아닌가. 
시루에 콩나물이 자라나듯 아이들은 그렇게 커 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언뜻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그냥 헛수고만은 아닌 셈이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끼얹으며 새삼 삶의 이치 하나를 깨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