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소년 시절의 고령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5일장 고령장날이다. 6.25 전후 전형적 농업사회일 때의 얘기이니 60여 년 전의 일이다.
이 지구상에 처음 인류가 나타나 원시생활을 할 때부터 필요한 모든 것들 즉, 재화의 획득은 자급자족을 했음이 정설이다. 그러다 조금 발전하여 물물교환이 이뤄졌으며 이 물물교환의 마당이 시장의 연원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의 경제학적 개념의 시장이 아니라 최소한의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는, 자연발생적 공간이 바로 시장이었을 것이라 미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장 얘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조선시대 한양 종로의 육주비전, 약칭 육의전(六注比廛? 六矣廛)이다. 최초의 공설시장이었던 셈이다. 이른바 무질서하게 상행위가 이뤄지던 난전(亂廛)을 제도화 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전국 단위의 거대조직 보부상이 있었다는데, 내가 직접 본 것은 그냥 보따리장사라고 만 했지 보상(봇짐장사)이니 부상(등짐장사)이니 하는 용어 자체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냥 ‘도붓장수’ 라고만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고령장이 서는 날(4,9일) 쌀 몇 되 짊어지고 20여리 걸어가서 무뎌진 호미.낫 벼리고 갈쿠리(까꾸리) 정도의 간단한 농기구 사오던 기억이 새롭다. 6.25 전엔 노선버스도 없었고 화물자동차는 목탄차만 있었으니 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6.25이후에야 노선버스도 생겼고 미군용 GMC만 비포장 신작로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 군용 지엠씨가 그때 들은 얘기로 무슨 ‘후생사업’을 한다며 장날엔 장꾼을 실어 날랐다. 무개차인데다 와르르 달려들어 타려는 사람들을 짚단 세워 쟁이듯 하여 정원이고 뭐고도 없이 마구 실었으니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신체 일부를 잘리는 큰 사고도 났었다. 그런 지엠씨 타고 고령장 한번 갔다 와야 시속(時俗)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장날 신작로는 인파로 뒤덮였다. 오죽했으면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장꾼같다’라고 했을까. 그날 밤엔 동네 사랑방에 모여 장날 얘기로 꽃을 피우기도 했다.
쌀 금새가 어떻고 누군 사돈을 만나 난전에서 ‘탁배기’ 한 잔으로 인사를 나눴다는 얘기도 했다. 특히 양대 명절을 앞둔 대목장날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당시 제일 번화하여 ‘읍내’로 통칭되던 경찰서 앞 네거리부터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만일 사람 발가락이 뒤로 붙었으면 뒷사람에 밟혀서 어쩔 뻔 했겠느냐는 우스개도 그때 나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대구 큰장, 현풍장, 고령장, 천창장, 성주장이 차례로 섰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장마다 특유의 별칭도 있었다. 아가리 크다 대구장, 까끄럽다(깔끄럽다의 사투리.지정학적으로 합천 등 외지인이 많이 모인 탓은 아니었을까?) 고령장, 천창장 들머리는 싸리판(가야산 밑이라 싸리나무가 많이 나 간단한 소쿠리, 바지게 등의 농사 도구를 만들었음) 등 이것 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고령하면 생각나는 게 또 있다. 금산재이다. 당시 선거구가 고령.달성일 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은 단연 성곡 김성곤(省谷 金成坤) 씨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기업인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자동차도 많지 않았지만 당시 우리들이 쓰던 정겨운 사투리로 ‘차구부리졌다(차사고)’ 하면 금산재였다. 넉넉한 재력으로 그가 금산재 터널을 뚫을까 하니, 군민들은 좀 불편해도 재 정상에 올라 모듬내의 아름다운 풍광과 발전해 가는 고령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더 좋으니 그대로가 좋다고 했다는, 미확인 얘기도 당시에 들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때 벌써 자연 친화적인 예지가 번뜩였던 것은 아닌가 한다.
일전 본보에 기획물 ‘고령 상무사’가 연재되어 불현 듯 오늘의 이 나라가 걸어온 길 중의 극히 일부이지만 ‘시장’이라는 역사의 한 단면이 생각나, 한 시대를 회고해 보는 것도 무익하진 않을까 하여 한번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