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지나간 뒤 폭염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른다. 휴가철이 시작되자 너도나도 산과 계곡, 바다를 찾아 피서를 떠난다고 야단들이다. 퇴직하고 처음 맞는 여름이라 팔공산 수태골로 더위사냥을 떠났다. 여기도 피서객들로 넘쳐난다.
마침 오늘이 초복이라 보신탕 집은 초만원이고, 삼계탕 집 또한 물량이 모자라 손님을 다 받지 못하고 돌려보낸다. 해마다 복날이면 수박으로 물배라도 채우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 같이 떠올라 시장 과일가게를 찾았다.
두 식구에 한 덩이면 며칠을 두고 먹겠지만,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하면 품어가 반길 이 없음에 가슴이 시리어 온다.
큰놈 두 덩이를 차에 싣고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고모님과 숙모님을 찾아뵙고 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귀갓길에 불현듯 지난날 시골 장터에서 비단장사 하던 고모님 모습이 자꾸만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고모님은 고향 인근 면소재지에 있는 어느 종갓집으로 시집을 갔다. 팔 남매의 맏 종부로 층층시하에 집안의 대소사를 억척같이 잘도 해내는 큰 머슴이었다. 위로는 시어른들을 모시고 아래로 시동생과 시누이 일곱명 시집장가 뒷바라지는 전부 고모님의 몫이었다.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고 집안의 궂은일은 도맡아서 척척 잘도 해내는 여장부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여성은 많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서 공부 한번 실컷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낮에는 집안일을 돕고, 야간학교에서 문자를 해득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누구보다 높았다. 처녀 때는 대구에 있는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 고향에 부쳐주었다고 한다.
결혼 후 가정 사정으로 인해 피붙이 남매를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재미로 청춘을 다 보낸 고모는 안 해 본 장사가 없었다. 십 리가 넘는 장터까지 비단 짐 리어카를 고모는 앞에서 끌고, 남매는 뒤에서 밀고 장사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힘든 삶에 동네사람들도 감동하여 책가방을 들어주던 모습에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릿해 온다.
병아리 교사시절 나는 여름 방학이 되면 커다란 수박 한 덩이 사들고 고모님 댁을 찾아 가는 게 고모님을 즐겁게 하는 일인 동시에 나도 즐거운 일이었다.
고종사촌들은 다행히 공부를 잘해서 대구의 명문고에 진학했었다. 고모 또한 자식교육을 위해 대구로 이사를 하였고, 시내에서 안 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며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당신의 몸은 고달파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니 모든 것이 상쇠 되어 뒷바라지 하는 것이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다행히 남매가 착하게 자라 지금은 고모도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누구나 그 시절의 생활은 대체로 궁핍했을 테지만, 유달리 힘겹게 살아온 고모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소설로 쓴다면 장편소설 몇 권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다.
아직도 수박가게를 지나칠 때면 고모님 생각이 나서 발길을 멈출 때가 종종 있다. 팔순이 넘은 고모님도 그 당시의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등에 업고 키우던 친정조카가 어느새 커서 직장에 취직하여 수박을 사들고 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고. 그 시절도 이젠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없던 아이 태어나고 있던 부모님 떠나가고 세월은 흘러 대가 바뀐다. 이제 집안의 상 어른이 되신 고모님을 자주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모님과 마주하는 날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오로지 자식을 위해 살아오신 보람이 있어 늦게나마 행복해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 온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고모님은 남매를 잘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내고 혼자 살고 계신다. 고종사촌 동생이 시내 모 의과대학 교수로 있다가 금년엔 병원장으로 취임했다면서 자랑하시는 고모님이 참 보기 좋았다. 모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명의 초청 특강프로에 고종사촌 동생이 호흡기 내과 강의를 할 때면 콧등이 찡해오고, 내 어깨가 으슥해지는 것은 왜일까.
수박을 실은 차가 골목길을 지나간다. 나에게 고모님과 수박은 불가분의 관계다. 고모님의 주름진 얼굴이 둥그런 수박과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