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에서 고전을 강독하는 허권수(許捲洙) 선생은 7만권이 넘는 장서가(藏書家)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장서가가 된 연유가 있었다. 
10세 때부터 국사책을 보다가 한문을 공부해야겠다는 맘을 먹었을 때는 고교생이 됐다. 그는 당시 4만 자가 넘는 한자가 수록돼 있는 ‘한자대사전’을 사고 싶었다. 그런데 값이 좀 비싼 3천5백 원이었다. 
당시 함안군수 월급이 5천원일 때이니 집에서 쉽게 사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5일 간 단식에 들어가며 ‘책 안 사주면 굶어죽겠다’는 투쟁(?) 끝에 목적을 달성했다는 거다. 이분이 공부해 진주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며 학문에 몰입하는 동안 장서가가 됐다는 것이다. 
위는 한 신문 칼럼을 보고 쓴 글이다. 나도 10대 후반 때 내 감히 허 교수에 비견(比肩)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좀 너무 유사하기도 해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60여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기억만은 선명하다. 
정말이지 얘길 하자니 언뜻 글이 잡히지는 않는다. 지금도 ‘3등문사’로 잡문을 끼적이고 있고 끝내는 ‘1등문사’는 될 가망이 아예 없으니 댈 핑계도 없으니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괴지심(自愧之心)일 것이었다. 
고령농고 2학년 여름방학을 지나 등교를 했더니 1학년 50여 명 신입생이었던 학생이 2명만 남았다. 이로는 정상 수업을 할 수 없으니 1학년 교실에서 학년 각각의 수업을 받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다른 한 명도 그렇고 나도 할 수 없다고 했으니, 휴학처리 됐으며 그것이 내 학력의 전부이고 말았다. 군 입대해서는 ‘고졸’이라고 했던 게 지금도 생각난다. 나는 학력 위조자(?)였다. 
나는 그 길로 농투성이만은 될 수 없어 언감생심 꿈도 야무진 소설가가 되겠다고 나섰다. 당시 지인의 문예지 자유문학, 현대문학을 빌려 보기도 하고 겨우 한두 권 사서 보기도 했다. 그 뒤 그때로는 이른바 지성지 사상계도 2년인가 구독했다. 문학지는 300원, 사상계는 거금 500원이었다.
그때 국어사전이 꼭 필요했으며 지인도 구입을 권했다. 역시 당시(1958년 刊) 동아출판사가 낸 ‘국어새사전’ 값이 6천 원이었다. 
위 칼럼에서 말한 군수 월급 5천 원보다 1천 원 더한 거금이었다. 
이를 내 힘으로 조달할 수가 없어 아버지께 이 사전만 사주면 학교는 포기하고 농사일 열심히 하겠다고 비장하게(?) 진언했더니 사나흘인가가 있다가, 훈시(訓示)나 뜻을 이루라는 격려도 없이 ‘아나, 여 다…’ 하며 주신 것이 끝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버지의 과묵(寡黙)하심에 더욱 중압감을 느낀 게 사실이었다. 
그 과묵에는 중후한 격려의 말씀이 분명 포함됐으리라 지금에야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 애지중지 사전의 값어치는 말로는 형언조차 할 길 없이 내게는 ‘그냥 소중했다’고만 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 당시는 그 사전 쉽게 살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은 아니었다. 더구나 농촌에서이니-. 그래도 아버지의 크나큰 배려로 구입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입지전적 기업인 정주영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마주 앉아 담소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래 정 회장은 어느 대학 나왔소?’ 하니까 조금 멈칫하더니, ‘아, 신문대학 나왔어요’ 했다. 내 감히 거기 비유함이 어불성설이지만 ‘나는 신문과 사전이 내 스승’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내게는 국어사전이 내 지력(知力)의 전부임을 실토하고 싶다.
  그러다보니 1천여 쪽이나 되는 사전이, 당시의 책 제본기술이 오늘만하지 않았던지 20여 년을 쓰고 보니 가운데 두 동강이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 붙이고 땜질하고 심지어 테잎으로 붙이치기도 했으니 너덜너덜 황갈색으로 변색도 됐지만 그래도 아직도 내 서가 구석진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간혹 옛날로 돌아가 뒤적이긴 하지만 고릿한 고서 특유의 향기는 잊을 수가 없다.  조크이지만 내 삶 다하는 날 함께 불사르라 애들에게 말하고 있다.
  내 여정이 그랬으면 저명한 문필가가 돼 이른바 멀고 먼 인생사의 성공적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이어져 ‘잡글쟁이’는 면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함이 회한으로 남는, 초라한 나의 자화상이 되고 말았다. 아버님에겐 참으로 송구한, 씁쓸한 회한임을 용서하소서!
  3등문사! 어찌 보면 참 가혹한 자탄이지만 어딜 보나 과장은 분명 아니리라! 그런데 얼마 전 중앙 일간지에 ‘못난 글은 못난 글대로 누군가의 타산지석이 된다’라는 헤드라인이 있었다. 타산지석 가이공옥(可以攻玉·못난 돌도 옥을 가는 데 사용할 수 있다)이 나의 정수리를 찔렀다. 분명 나를 향한 질책의 매서운 죽비(竹扉)였다. 어쩌면 분려(奮勵)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지난 해 내 자전적 수상록 ‘대망(大望)이 대망(大蟒)이 되다’를 출간할 때 한 지심우(知心友)가 쓴 서문에, “······친구는 아쉽게도 회재불우(懷才不遇-재주는 있지만 때를 만나지 못했다)일세 그려”라 하는 위로에다 원망까지 은근히 스며든 글을 받았던 일이 있다. 
  나의 이 능력부재를 정곡(正鵠)으로 찔러 준 ‘회재불우’로 자위하며 서툰 오늘의 이 붓대롱도 이만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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