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공원 산책길을 거닐고 있다. 저쪽 한 귀퉁이에서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손자에게 오줌을 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자의 고추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표정이 자못 흐뭇해 보인다. 입가에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 담아 출품을 하면 대상감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지난 시절을 회상해 보면 지금과는 엄청난 사회적 인식의 차이를 느끼곤 한다. 당시는 남아선호사상이 극도로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아들이 없으면 대(代)가 끊어진다는 생각들을 했었다. 형의 갑작스런 요절로 본의 아니게 장손이 된 나는, 결혼도 늦었지만 결혼 후 두 살 터울로 딸 둘을 낳았었다. 그리 되고 보니 조부모님은 물론이고 처가에서 더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그놈의 고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친구들이 아들 낳았다고 한턱 쏜다는 초청이 빗발쳤지만 자리하기가 싫었다. 남자의 자존심에서일까, 자신이 무언가 좀 모자라는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일 민망스러운 일은 명절이나 방학 때 고향에 가는 것이었다. 장손을 잃은 할머니의 심정은 물론이고, 부모님 또한 후손이 끊길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아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 무심코 베개를 만져보았다. 베개 속에 딱딱한 물건이 만져졌다. 뭔가 싶어 얼른 꺼내 보니 놀랍게도 1)작두꼴삐였다. 웬 작두꼴삐를…? 아내를 다그치며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날은 모른 척하고 지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그 날 밤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또 보고야 말았다. 아내가 난생 처음 보는 울긋불긋한 총 천연색 팬티를 입고 자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거에서 당선될 입후보자의 선거현수막을 밤에 몰래 떼어와 지어 입은 것이었다. 아마 장모님께서 노심초사 끝에 극약처방으로 시키신 일인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아내의 말초신경은 늘 그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건강 밥상에서부터 잠자리까지도 그랬다. 자기는 채식만 하고, 내겐 육식을 강요하는 것이며, 일기가 좋지 않는 날이나 초저녁에는 잠자리도 거부했다.
원래 나는 채식 주의자였다. 어린 시절 고기반찬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던 터라 시골밥상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지금도 신토불이 음식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 어릴 적 가난했던 시절 채식을 많이 하던 입맛 때문일 것이다. 그것뿐이랴.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끊으라고 닦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 후 몇 차례 술집을 옮겨 다니며 거나하게 취해서 밤늦게 귀가했었다.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 담을 타넘고 큰방에 들어가니 아내는 부엌방에서 자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격하게 부부싸움을 했던 것 같다. 이튿날 아침을 거른 것은 물론이고, 출근하여 속이 쓰려와 후회도 많이 했었다.
그 날 이후로 술을 딱 끊고 아들 낳기 작전에 동참하기로 했다.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사와선 꼼꼼히 읽었다. ‘아들 낳는 비법’이라는 일본책이었다. 남자는 육식을 주로 하고 여자는 채식과 운동을 많이 해야 하며, 술과 담배는 물론 잠자리도 금욕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서가 새벽에 잠자리를 가져 득남을 했다기에 그런 귀동냥도 총동원했던 일이며, 시골 한약방에서 아들 낳는 약을 거금을 들여 지어 먹은 것이 적중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자리를 같이하는 날 밤, 머리맡에는 언제나 소-다수가 한 사발 놓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뒷물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득남 작전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제일 먼저 바뀐 건 며느리에 대한 아버지의 대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위로 딸 둘을 낳았을 때는 한 번도 위문을 오지 않으시던 분이 득남 소식을 듣고서야 한 칠도 되지 않아 몸조리 하고 있는 처갓집에 불쑥 찾아오신 것이다. 거기다 고추를 쓰다듬으며 수고했다고 격려금까지 놓고 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좋았으면 먼 길을 단숨에 달려오셨을까. 고추의 위력이 대단하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퇴근하면 총알같이 집으로 향했는가 하면 친구들의 아들 돌잔치에도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었다. 또한 방학이나 명절 때 고향에 가면 부모님께서 부엌에 들어와 불을 지펴 주시기도 하고 힘든 일은 시키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팔순이 넘어 돌아가신 할머니께 증손자를 안아보게 해 드리지 못한 일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해온다.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은 사회적 인식의 차이가 너무도 많이 바뀌었다. 그 때 공들여 낳은 고추가 장가를 가서 연이어 고추 둘을 낳았다. 그 고추 가라사대 “둘째가 공주였으면 좋았겠는데……”라며 서운해 하더란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세상이다.

요사이 항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재미있다. 딸 둘이면 ‘금메달’이고,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은메달’, 아들 둘이면 ‘목매달(?)’이란다. 그리고 딸을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 낳으면 리어카 탄다나? 지금 생각하면, 그 놈의 고추가 뭐 길래 그리 안달뱅이를 했던가 싶어 허허 웃음이 나온다.

야구 용어로 투-볼 뒤 적시안타를 친 우리 부부는 득남 작전에 겨우 성공했지만, 다행히 삼남매 모두 가정을 이루어 첫 적시안타를 치는 행운을 잡았고, 현재 손자 넷, 손녀 하나를 두고 있다. 앞으로 손자 하나만 더 얻으면 사위들과 ‘고추가족’ 야구팀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욕심 같아선 은근히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세대차일까, 아무리 ‘딸딸이’가 득세하는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추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을 어쩌랴!

각주) * 작두꼴삐 : 작두날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고추 모양의 쇠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