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지인들과 함께 팔공산 한티 재를 넘어 군위에 있는 고·김수환 추기경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다. 파란 가을하늘엔 목화솜 같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은빛 억새꽃이 갈바람에 물결치는 팔공산은 군데군데 단풍이 들고 있었다. 도로 주변에는 코스모스가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겼고, 밭둑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군위에서 제일 소문난 매운탕 집을 찾았으나, 집수리 중이라 옆에 있는 집에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곧 바로 달려 김 추기경 기념관을 찾았다.
말끔히 단장된 기념관은 주위의 억새꽃과 코스모스 그리고 들국화가 만발하게 피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했다. 성모 마리아상 뒤로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 옛날 이엉으로 지붕을 단장한 생가, 우물 그리고 옹기 가마굴 등 어느 한 곳 험 잡을 데 없는 자연정원 그대로였다. 코스모스, 구절초와 억새꽃이 한창인 정원을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시간이 모자라 너무나 아쉬웠다. 기념관 입구에 걸어 놓은 추기경님의 영정은 참 포근했다. 계단을 올라 마리아 동상 뒤에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란 글귀가 잔잔한 가슴을 울렸다.
살아생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었던 김수환 추기경님! 한 평생을 남을 위해 희생된 삶을 살았던 당신이었기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은 것이 아닐까. 
“난 바보처럼 살았다.”며 항상 낮은 곳에서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였던 어른이기에 더욱 가슴 깊이 우리들 마음속에 오래 오래 각인되지 않았을까. 생전에 유언으로 내 몸의 성한 장기가 있으면 환자에게 기증하라는 말씀에 따라 각막을 기증하셨던 천사 같은 분이 아니었던가. 빙그레 웃고 있는 영정사진을 보니 가슴이 찡해왔다. 내 한 몸은 없어져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던 성직자! 언제나 남을 위해 삶을 사셨던 분이었기에, 선종해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뜬금없이 어느 천주교 공원묘지 양쪽 입구에 새겨진 글이 뇌리를 스친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 내일은 너) :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다는 뜻의 이 라틴어는 결국 죽음을 기억하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 이 자리에 누워있는 나 뿐 아니라, 내 묘지 앞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당신도 머지않아 곧 죽는다는 식의 해석은 얄밉게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까 아등바등 애타게 살지 말라는 식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묘지 앞의 그 글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우리 일행은 기념관을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신라의 고찰 지보사(池寶寺)를 찾았다. 오래된 고찰이지만 말끔히 단장해 놓았고, 보존도 잘돼 있었다. 대웅전에 참배하고 500년 묶은 은행나무 옆에 있는 3층 석탑은 보물 682호라고 적혀 있었다. 절 뒤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한껏 푸르름으로 옛 고찰을 감싸 주었고, 절 담장에는 담쟁이덩굴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어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지보사를 뒤로하고 지인이 살았던 고향집 이야기를 들으며 황금 들판의 그림 같은 풍경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 차는 느림보 거북이처럼 차창 밖으로 가을 풍경을 감상하며, 제2석굴암이라 부르는 ‘삼존석불’ 앞에 도착했다. 삼존불 가까이는 들어가지 못해 멀리서 참배하고 발길을 돌렸다. 옛날에는 삼존불 입구의 식당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관람객들이 줄어 한산한 분위기에 을씨년스러웠다.
인구감소의 시대 탓일까? 삼존불을 뒤로하고 옛 한티 재를 넘어 오는 길에 3천 원짜리 잔치국수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좋은 계절에 가까운 지인들과의 가을 나들이는 오래 남을 추억거리가 되었고, 오랜만에 가을 정취를 맛본 행복한 하루였다.